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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푸어’ 신입사원, 직접 법 개정에 나서다

입력
2017.02.2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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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ㆍ복직자 연차보장 수다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간담회실에서 한정애 의원과 함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치스타트업 와글 제공
신입사원ㆍ복직자 연차보장 수다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간담회실에서 한정애 의원과 함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치스타트업 와글 제공

“신입사원 시절, 일본인인 여자친구가 저를 보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래서 휴가신청을 했더니 ‘신입이라 연차가 없다’더군요. 하필 그때 회사는 왜 그리 바쁜건지… 며칠간 매일 야근을 하다 보니 숙소에서 하염없이 저를 기다리던 여자친구는 지쳤고, 결국 헤어지게 됐습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너무 아파서 그나마 몇 개 없는 연차 중 하루를 사용하겠다고 했더니 상사는 ‘너만 애 키워?’라며 화를 냈어요.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정말 펑펑 울었습니다.”

22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신입사원 연차보장 수다회’에서는 ‘연차푸어’ 신입사원ㆍ복직자 10여명의 씁쓸한 경험담이 이어졌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야근까지 미루며 이들이 모인 건 지난달 발의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지지하기 위해서다. 1년 미만의 근로자의 유급휴가일수를 제한하는 근로기준법 60조 3항을 삭제하자는 이 법안은 불편함을 지나치지 않은 한 신입사원 덕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신입사원, 근로기준법에 의문을 품다

조현지(28ㆍ가명)씨는 아이가 6개월이던 지난해 초 새 직장에 입사했다. 출산 전 다니던 회사에 비해 연봉은 적었지만 매일 정시 퇴근에 주말근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웠다. 시도 때도 없는 야근으로 자녀가 부모 얼굴을 잊어버리는 ‘반도의 흔한 직장’에 비하면 썩 괜찮지 않은가.

기쁜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떠올랐다. 1년 미만 근로자인 그에게 주어진 연차가 0일이었던 것. 현행 근로기준법상 유급휴가는 1년의 80% 이상 근무한 근로자에게만 주어진다. 물론 1년 미만 근로자들도 연차를 쓸 수 있지만, 2년 차에 주어지는 연차 15일 중 일부를 ‘당겨’써야 한다. 결국 한해 근로일수 250일(공휴일/주말 제외) 중 그가 쉴 수 있는 건 7.5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적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워킹맘인 조씨에겐 태부족이었다. 입사한 지 1년여 만에 그는 아이가 아프거나 친정 부모님 병환 등의 불가피한 이유로 벌써 연차를 12일이나 써 버렸다. 휴식을 위해 휴가를 쓰는 건 엄두도 못 냈다.

더욱 답답한 건 연차가 부족한 것이 법 위반도 아니라서 누구에게 하소연하기도 어려웠다는 것이다. 상사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우리회사는 근로기준법을 따를 뿐’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조씨가 유학생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찾아본 결과 프랑스의 경우 1개월만 만근해도 법정 연차 37일이 보장됐고, 독일도 근로한 지 6개월 이후부터 법정연차 24일을 보장했다. 결국 법 자체가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조씨는 신입사원ㆍ복직자의 휴가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인터넷 입법 플랫폼에 올렸다. 제안 한 달 만에 같은 고민을 하는 시민 1,789명이 모였다. 국회톡톡 홈페이지 캡쳐
조씨는 신입사원ㆍ복직자의 휴가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인터넷 입법 플랫폼에 올렸다. 제안 한 달 만에 같은 고민을 하는 시민 1,789명이 모였다. 국회톡톡 홈페이지 캡쳐

혼자 숨죽이고 있을 ‘미생 중의 미생’과 손잡다

원인을 알았지만 바꾸려니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씨 혼자 해결하기엔 너무 큰 산이었다. 더군다나 이 조항으로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은 모두 조직 내 약자였다. 어려운 취업난을 뚫고 가까스로 입사한 신입사원들은 ‘휴식권’을 외치기는커녕 퇴근시간조차 눈치를 보는 현실이다. 이직자나 복직자들, 특히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워킹맘들 역시 직장 내 편견으로 인해 감히 나서기 어려웠다. ‘수다회’에 참석한 워킹맘 A씨는 “인사팀에 문제제기를 해도 들어주지 않아 노동조합을 찾아갔지만, 사무국장은 ‘남들 일할 때 쉬고 온 사람 연차를 보장해주면 그 시간에 일한 사람은 어떻게 되냐’고 되물었다”고 말했다. 모성보호를 위해 법적으로 보장된 시간이 마치 여성을 위한 특별휴가처럼 비춰진 것이다.

고민은 작은 행동 하나로 풀렸다. 조씨는 우연히 지난해 10월 ‘국회톡톡’이라는 온라인 시민입법플랫폼을 알게 됐고 여기에 신입사원 연차보장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제안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한 달 만에 1,000명이 넘는 신입사원ㆍ복직자들이 참여했다. 휴식뿐만 아니라 불의의 상황에도 마음 편히 시간내지 못했던 숨은 미생들이 온라인을 통해 한 곳에 모인 것이다.

작은 행동으로 시작하는 변화

조씨와 시민 1,789명의 제안은 한정애 의원에게 전달됐고, 법률검토를 거쳐 지난달 18일 정식 발의됐다. 개인의 제안이 입법발의로 이어진 극히 드문 사례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다. 아직 법안 통과까지는 여러 단계가 남았다. 그렇지만 ‘수다회’에 참석한 한 의원은 개정안을 책임지고 통과시키겠다고 직접 약속했다. 한 의원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132조도 6개월 이상 근무한 근로자에게 유급휴가를 보장하도록 되어있다”며 “개정안 통과에 그치지 않고 휴가가 근로자의 능력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필수적 권리라는 인식까지 뿌리내리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프로불편러의 뾰족한 질문이 모여 결국 세상을 바꾼다고 했다. 한 사람의 불편은 불평으로 남지만, 누구나 불편을 느끼는 것에 침묵하지 않고 함께 찌르면 결국 해결방법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고민을 하는 직장 동료들, 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름 모를 네티즌들의 사연에 용기를 얻어 행동할 수 있었다”며 “수다나 댓글 등 소소한 방법으로라도 자신의 불편을 더 많이 말해야 변화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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