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판단, 모두에게 유리하지 않아

-헌재는 민의를 헌법적으로 확인해야

-정치권은 결과수용 약속, 혼란 줄여야

헌법재판소가 정치적 판단을 한 사례는 없지 않다. 1996년 5ㆍ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공소시효가 지나버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범죄행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정지시켜 처벌토록 한 것에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김영삼정부가 공공의 적이 된 이들을 처벌하려 한 데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같은 누구나 공감할 명분이 있었다. 재판관 9명 가운데 합헌 의견이 4명, 위헌 의견은 5명으로, 위헌 정족수(6명)에 미달해 위헌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헌재가 합헌 도장을 찍어 준 것에 여론은 환호했지만, 이는 헌재의 명백한 과공(過恭)이었다. 특별법의 합헌 결정으로 1979년 12ㆍ12 사태와 1980년 5ㆍ18 항쟁 전후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는 문민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인 1993년 2월 24일까지 정지됐다. 이런 소급입법에 합헌 결정을 내려 죄형법정주의를 훼손시킨 당시 재판관들은 지금에 와서 상식을 벗어난, 정치적 결정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 후임 재판관은 “헌재 역사에서 정치 판사들이 가장 큰 오점을 남겼다”고 혹평을 가했다.

헌재가 다시 오점을 찍으라는 강요를 받고 있다.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은 5ㆍ18특별법심리와는 성격이 다른 법률 절차이고, 정치권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위임한 사건이다. 대통령과 그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는 사안의 파장은 법률 위헌성을 따지는 것에 비할 바 아니다. 그 때문에 탄핵심판이 임박해지면서 헌재 흔들기가 정치권과 헌재 주변에서 우려될 만큼 노골화하고 있다. 대통령 변호인단은 재판부 모욕을 넘어 탄핵 시 내전을 경고하며 ‘아스팔트의 불상사’를 언급했고, 일각에선 테러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탄기국’으로 불리는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운동본부 측은 최순실 게이트 제보자인 고영태 전 블루K 이사가 현지검사와 사건을 공모했다며, 문제의 검사 신원을 제보하면 1억원을 주겠다는 신문광고를 냈다. 모두 탄핵 결정이 나오면 불복하겠다는 포석으로 읽힌다. 야권 대권 주자들조차 정치적 득실을 앞세워 탄핵심판 결과를 수용할지 공개적으로 약속하지 않고 있다. 헌재 인사는 “모두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에 빠져, 정녕 나라를 걱정하는 ‘직업’은 없는 상황”이라며 “언론이라도 도와주고 지켜 줘야 한다”고 압박감을 토로했다. 탄핵심판이 인용과 기각 어느 쪽으로 나든 간에 정치권이 먼저 결론 수용에 대한 합의를 이뤄야지, 그렇지 않으면 탄핵심판 뒤 한동안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져 대립을 반복할 것 같은 양상이다.

헌재가 외부에서 흔든다고 흔들려서는 안 되겠지만 재판관들도 사람이다 보니 민감한 사안을 판단할 때 법리가 여론에 밀리기란 쉽다. 어느 쪽이든 재판관들에게 바른 판단을 원한다면 헌재를 흔들지 않는 게 우선이다. 헌재 주변에선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기간 연장 문제까지 탄핵심판과 얽혀 해석될 정도이다. 특검은 수사기간이 연장되지 않으면 이달 28일, 연장이 되면 3월 30일까지 활동하게 된다. 헌재는 그 가운데 놓인 3월 13일 이전에 탄핵 선고를 하겠다는 입장인데, 탄핵심판이 수사 기간 중, 또는 종료 이후 발표되는 것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야권이 수사 연장을 위한 특별법 처리를 시도하고, 여당이 이를 무산시킨 것은 수사가 재판관들에게 미칠 부담에 대한 계산이 다른 때문이다. 이런 시선을 덜기 위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수사기한 연장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대통령 탄핵심판 절차상 헌재의 결정은 모두가 수용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리고 헌재에는 민의를 헌법적으로 확인하고 헌법 정신과 국민의 뜻에 충실히 따라야 할 의무가 부여돼 있다. 헌재는 특정한 이해를 넘어 헌법과 헌법질서가 최고의 가치임을 모든 정치 사회 세력에 과시해, 헌법수호의 보루임을 보여 줘야 한다. 이번에는 지역적 색채나, 과거 경력으로 재판관의 성향이 분류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입증할 필요가 있다.

이태규 뉴스1부문장 tg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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