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유토피아

페미니스트들이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은 무엇일까?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미국과 한국 페미니스트 64인이 성폭력, 패션, 가사노동, 경제, 보육 등 다양한 일상 속 장면에서 상상한 유토피아를 모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가 2018년 이후에 시간제 노동자 평등권을 얻어 냈어요. 월급만이 아니라 승진도 포함돼요. 당신이 아마 최고경영자라고 불렀을 경영팀 지도자 세 명 중 두 명은 여자예요. 그 중 한 사람은 임신 중에 채용됐고, 남자는 아이 둘에 대해 6개월씩 육아휴직을 냈어요. 월급의 85%가 나오기 때문에 남자들도 대부분 휴가를 내고 싶어해요. 보육교사가 이제 좋은 직업이라서 직원 중 절반은 남자예요.”

짐작했겠지만 이 이야기는 허구다. 하지만 내가 어떤 곳에서 살고 싶은지 상상해보는 건 자유니까, 이런 생각들이 모여 책으로 나왔다. 미국 페미니스트 57인이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이상적 사회 모습을 담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다. 한국어 판에서는 한국 페미니스트 7인의 글도 함께 실렸다. 위 이야기는 미국의 여성노동자협회 ‘9to5’에서 임원을 지냈던 엘런 브로보가 적은 ‘페미니스트의 미래직장’ 중 일부다.

에세이, 소설, 시, 인터뷰 등 글의 형식뿐 아니라 사진과 그림도 포함된 말 그대로 생각의 집합체다. 누구나 한 번쯤 머리 속에서 그려 봤던, 혹은 전혀 상상도 못해 본 유토피아를 만날 수 있다. 미국의 뉴스ㆍ엔터테인먼트 웹사이트 ‘버즈피드’는 ‘가슴 작은 여자들은 못 입는 51가지 아름다운 브라들’이라는 기사를 낸 적이 있다. 세라 마테스는 이에 사과한다며 ‘브래지어 대신 입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새로 정리했다. 작가 에린 맷슨은 신체에 대한 부끄러움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그렸다. “머리를 말리던 기계는 온열기로 쓸 수 있다. 립스틱 팔레트는 가장 섬세한 유화를 그리는 데 쓰면 된다. 물론 여전히 자의로 립스틱을 바르고 미용 제품을 쓰려고 할 수도 있다. 선택사항이다.”

최근 국립국어원은 여론 뭇매를 맞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뜻풀이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을 수정했다. ‘예전에’를 덧붙였다. 대체 페미니스트가 누구고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여자 혼자 여행을 떠나는 데 전혀 망설일 것이 없는 곳, 헌법 전문에 트렌스젠더를 포용하는 곳, 여성의 일로만 인식돼 온 출산 식사 양육 청소 등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곳, ‘키스로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장면이 없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곳 등 생활밀착형 상상력이 발휘돼 있다.

책을 읽다 보면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여성만을 위한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카피라이터 김하나가 썼듯 페미니스트는 ‘모여 앉아 남성을 음해하려는 집단이 아니라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해방하려는 사람들’이다. ‘유부녀 맞아? 애 엄마 맞아?’ 라는 연예뉴스 제목이 더는 없는 나라를 원하지만 동시에 ‘남자는 태어나서 n번 운다’는 말에서 n이 저마다의 자연수인 나라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