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앞 분리수거장에 가는 동안만이라도 큰 아이가 따라 나선다고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여덟 살이 됐으니 그 정도 시간은 혼자 머물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아닌가. 차에 스마트폰을 두고 오는 날에는 늘 실랑이가 벌어진다. 아빠가 주차장에 다녀오는 동안 잠깐만 TV를 보며 있으라고 다그쳐도 기어이 따라 나서겠다고 한다. “5분이면 돼” “밖은 추우니까 잠깐만 있어”라며 달래 봐도 소용 없다. 어떤 아이들은 엄마가 목욕탕에 가 있는 꽤 긴 시간 동안 혼자 있기도 한다는데, 우리 집 아이는 왜 이럴까. 정말 막무가내로 따라 나서겠다고 할 때는 이성을 잃게 된다. “야! 잠깐이면 된다고!”

“아빠가 금방 올텐 데 왜 매번 따라와?” 답답한 마음에 아이에게 물었다. “무섭단 말이야.” 아빠가 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아빠가 금방 온다고 약속하고 나가서 지금까지 오지 않은 적 있었어? 언제나 약속을 지켰잖아.” 정말이었다. 내가 믿기로 나는 아이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아이가 불필요한 상상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두려움에는 아무 근거도 없었으니까.

내가 다그치자 아이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기억해 냈다. 엄마가 자기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엄마, 아빠가 전부 없어졌던 적 있단 말이야.” 기가 찼다. “언제?” 하고 묻고 나서야 아이가 무슨 일을 말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두 해 전, 열차를 타기 위해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역으로 가야 했는데 이른 새벽 시간이라 택시를 잡지 못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 아이를 침대에 둔 채 아이 엄마가 나를 역까지 태워다 줬는데 그 사이에 아이가 깨고 만 것이다. 아이는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 왔다. 엄마가 도착했을 때 아이는 속옷차림으로 운동 나가시는 동네 아주머니 품에 안겨 있었다. “그 때 왜 나만 두고 간 거야?” 아이가 물었다. “너 자니까 깨우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야.” 다른 기억도 꺼냈다. “아빠가 수술하는 거 안 아프다고 했는데, 엄청 아팠어.” 지난 여름에 했던 아데노이드 수술을 이야기였다,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전혀 무서워할 것 없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아이의 두려움’에 근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이의 두려움에 아무 근거가 없다는 내 생각’이야말로 아무 근거도 없었던 것이다. 아데노이드 수술은 정말로 아팠으니까.

며칠 전 유치원에서 아이가 다쳤다고 일찍 데려가라는 연락이 왔다. 아이는 혼자 걷기 힘들 정도로 한 쪽 발목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병원에 데리고 가려 했더니 무섭다고 울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은 금방 낫는다며 달래봤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빠 말이라면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일까, “아빠 병원 꼭 가야 해? 또 수술해?”라며 몇 번을 물었다. 나는 이런 문제라면 타협 없이, 아빠의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만 울어! 병원 가야 해. 더 울면 혼날 줄 알아.”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진료를 받는 동안에도 아이는 계속 울었다. 엑스레이 촬영 중에도, 깁스 치료를 위해 부목을 대는 동안에도. 병원을 나와 업히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시끄러우니 울지마’라는 것이 아빠의 권위라면 그런 권위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앞으로 두 주 동안 깁스를 하고 있어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아픈 것을 아프지 않다고, 두려운 것을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함께 두려워하는 편을 택하겠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번거롭더라도, 적당히 둘러대거나 힘으로 누르지 않고 서로의 두려움을 헤아리고, 끊임없이 설득해 가는 과정이 ‘인문’이고 또 ‘철학’의 태도일 텐데 육아만큼은 철학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 아이 두려움을 이해하거나 옹호하기는커녕, 어쩌면 나는 아이의 두려움이 내 두려움이 될까 봐 무시해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를 껴안으면 두려움도 함께 껴안는 것임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탓이다.

권영민 철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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