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자기 집에 살아야 돼, 사람은.”

내가 내놓은 집을 보러온 세입자가 수리를 요구하자 집주인이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려면 자기 집에 살아야 하고, 월세살이는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적지 않은 월세에 대단한 리모델링을 요구한 것도 아니지만 메시지는 결국 이거였다. “꼬우면 너도 사든가.” 세입자는 모든 맥락이 지워진 채 오직 ‘자기 집’이 없는 사람으로만 표상되고 집주인과의 관계에서 위계가 형성된다. 내 집을 보러온 세입자는 자기 집이 2채나 있었기 때문에 그런 발언이 기분은 나쁠지언정 모욕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남의 집’을 전전하는 사람들에게 반전의 여지는 별로 없다. 반전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 쉽게 무시하는 집주인에게 노출되고 그 모욕을 견딘다. 헬조선의 전통이라면 전통이지만 최근에는 전체적인 주거 환경이 하락하면서 이러한 양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1인 가구는 늘고 물가는 뛰는데, 임금이나 노동환경은 제자리 걸음이다. 옥탑방은 낭만이 아니라 보편적 주거 공간 중 하나가 되었다. 인터넷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괴이하고 충격적일 정도로 열악한 방 사진이 올라온다. 변기와 싱크대가 한 공간에 있거나, 2층 침대 밑에 책상을 설치해 놓고 복층이라고 하거나, 침대 한가운데 기둥이 뚫려 있는 식이다. 아늑한, 위치 좋은, 가성비 좋은, 개성 있는… 같은 뻔뻔한 수사가 동원된다.

도저히 그곳에 살 사람을 생각하고 만든 공간이 아니지만, 그런 방들은 월세가 시세보다 싸기 때문에 내놓자마자 금방 나간다고 한다. 싸다고 해도 상대적인 개념이라 한 달에 수십만 원은 지불하니 말 그대로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게다가 세입자가 여자일 경우에는 안전 때문에 추가 비용까지 발생하니 아아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자기가 살 공간이 아니니까, 사람이 사는 방이 아니라 월세를 뽑아내는 ATM기 정도로 보기 때문에 “이만하면 괜찮다”라며 들이밀었을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도 사람은 당연히 살 수 있다. 하지만 삶은 단순히 생존만이 아니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삶의 목적도 아니다. 영양분과 산소만 공급받으며 살아 있음을 ‘산다’라고 하진 않는다. 집은 잠만 자거나 비만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개인이 머물고 시간이 쌓이고 기억을 덧입히면서 기호화하는 장소이다.

생활의 윤기는 페인트의 벗겨진 칠처럼 사소한 흠결, 그것을 고쳐주지 않으려는 이기심으로 쉽게 때가 타고 바랜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쾌적함이 보장된다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안락함이다. 열악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이 꾸려가는 생활의 면면들은 다 다르겠지만, 환경이 나아지면 모두가 그보다 훨씬 더 잘 살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공간이어도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매물이 나오는 거라는 진공 세계의 시장 경제 논리는 집어치우고,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주거정책이 필요하다. 대책은 뻔하다. 세입자들을 보호하고 수준 미달의 주택들은 규제하며, 공공주택을 보급해야 한다. 무엇보다 급변하는 현실에 따라가야 한다. 현재의 주거정책은 뒤떨어져도 너무 뒤떨어져 있는데, 예를 들면 임대주택 청약 1순위는 아직도 신혼부부와 노부모 부양자다. 이러한 이성애-기혼 중심주의는 특정 계층의 사람들만을 복지의 대상으로 승인한다. 또한 순위를 매겨야 할 만큼 부족한 공공주택이나 임대주택은 절박함을 서열화하고 불행을 계량한다.

살아갈 공간을 구하는 데 자괴감을 느끼거나 터무니없는 공간에 터무니없는 값을 지불해야 하는 현재의 주거 실태는 정상이 아니다. 사회는 임대업자들의 배만 불리며 세입자들을 완전히 방치하고 있다(상가 건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방치는 결국 취약자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위협으로 작용하고,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이만하면 괜찮은 방이라고? 그럼 니가 사세요.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