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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이삿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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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이삿날

입력
2017.02.2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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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아파트 옆 동으로 이사를 왔다. 종종종 뛰어가 보니 아주머니 두 분이 부엌 짐을 챙겨 넣고 있었고 아저씨들은 사다리차에서 짐을 내리느라 바쁘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서둘렀던 친구의 볼이 발갛게 달아 있었다. 김치냉장고도 제자리를 찾고 TV도 거실장 위에 잘 앉았다.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어깨야. 친구는 잔뜩 엄살을 부리며 잠깐 의자에 몸을 부렸다. 아카시아 나무를 잘라 만든 긴 식탁은 아무리 봐도 예뻤다. 친구는 식탁 위에 널려 있던 맥주 한 캔을 집었다. 꿀꺽꿀꺽, 맥주 넘어가는 소리에 아주머니 한 분이 웃어서 나는 맥주를 건넸다. “드시면서 하세요.” “아유, 그래도 되나?” 아주머니는 냉큼 맥주 캔을 땄다. 소파를 옮기던 이삿짐센터 사장 남자가 친구에게 농을 던졌다. “어허, 사모님! 그러다 사장님한테 쫓겨납니다!” 싱글인 친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왜 쫓겨나요?” “남편이 죽도록 벌어주는 돈으로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는데 쫓겨나야죠! 요즘 아줌마들 진짜 큰일이야.” 나도 마흔 두 살에야 결혼을 해서 싱글인 내내 그런 소릴 숱하게 들었다. 그래서 친구나 나나 발끈하지도 않는다. “쫓아낼 남편이 없어서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할 뿐이다. 그래도 남자는 제가 무례한 줄도 모르고 계속 떠든다. “결혼 못했어요? 왜요? 멀쩡하신데?” 그럴 땐 대답할 말도 없다. 그냥 “안 멀쩡해요” 하고 만다. 친구가 싱글인 걸 알아도 사장 남자는 친구를 부를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해 계속 사모님, 사모님 불렀다. 남자가 시답잖은 소리를 자꾸 해서 뿔이 난 내가 한 마디 하려 했지만 친구가 나에게 속살거렸다. “이따 간짜장 시켜먹자. 이삿날이잖아.” 그 말에 나도 싱겁게 웃고 말았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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