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였던 ‘나쁜 사람’은 빈집을 털다 붙잡혔지만 사정이 딱해 형사들이 풀어주는 불쌍한 사람을 표현했다. 하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폭로로 시작된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의 노태강 국장과 진재수 과장이 대통령에게 ‘나쁜 사람’으로 찍혀 좌천된 끝에 사임한 일이 밝혀지고, 여기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파문이 겹쳐지면서 대통령과 맞서거나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으로 통하게 되었다(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도 ‘나쁜 사람’으로 지목된 바 있다).

‘나쁜 사람’은 대통령의 윤리적ㆍ정치적 시각과 태도를 드러내준다. 그것은 “밉다” “싫다”와 같은 주관적 감정을 “나쁘다” “그릇됐다”와 같은 객관적인 윤리적 언어로 표출하는 감정주의 윤리관의 전형적인 예로서 “나만 옳다”는 독선적인 태도를 함축한다. 아울러 다양한 가치와 이익을 조율하여 공존공영을 모색하는 정치를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 사이의 적대관계로 왜곡하는 이분법적 인식을 담고 있다. 이런 인식은 현대의 비극적인 사건들에 공통적으로 깔려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홀로코스트를 부른 나치 전체주의와 인류생존을 위협했던 미소 냉전은 각각 우월인종/열등인종, 친구/적의 이분법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 승자독식과 극단투쟁으로 일관해온 한국정치도 ‘우리’/‘남’(혹은 ‘종북좌빨’/‘수구꼴통’)의 이분법에, 미국사회와 세계질서의 혼란스런 현실도 상당부분 트럼프의 흑백논리에 기인한다. 이런 인식이 퍼진 곳에서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사생결단의 투쟁만 계속될 뿐 상호존중과 관용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안정적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는 특히 ‘나쁜 사람’이 필요한 이유를 강조하고 싶다. 어디서든 주류사회나 권력자에게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필요한 이유는 구성원들 간 논쟁을 촉발시킴으로써 집단의 진로와 정책의 타당성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자들이 야기한 치열한 논쟁과 토론은 정책의 비합리성과 비효율성을 드러내주고 부패를 막아줌으로써 집단의 생존과 번영을 담보한다(17일 파산한 한진해운은 사외이사진이 일찍부터 반대 목소리를 냈더라면 상황이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반대자가 필요한 다른 이유는 이들이 불의한 체제의 개혁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회는 기득권층과 지배적인 가치관에 반대한 소수자들의 저항을 통해 더 자유롭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체제로 발전해왔다. 17세기 후반 영국의 명예혁명, 18세기 말의 프랑스혁명, 19세기 후반의 노동자운동, 20세기의 여성운동과 흑인운동이 체제 개혁을 추동했고, 다문화시대인 지금은 소수 인종ㆍ문화집단들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촛불혁명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반대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교개혁은 패권 종교의 탄압에 맞섰던 용기 있는 저항자들이 주도했고, 빈곤과 질병을 퇴치하고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준 과학혁명 산업혁명 의학혁명 인터넷혁명도 낡은 지식체계에 도전한 모험가들 덕분에 성공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등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도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거스른 이단아들이 이끌고 있지 않은가.

특히 반대자는 민주공화국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하다. 민주공화국은 다양한 목소리들의 쟁론을 통해 최선의 정치적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반대자들은 반드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민주사회가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반대당(opposition party)인 야당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반대 목소리야말로 민주사회의 안전판이라는 확신을 반영한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 정권의 총체적 실패는 권력자와 상관의 부당한 지시에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나쁜 사람’이 많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나쁜 사람’을 부당하게 내쳐버린 박근혜 리더십의 배타성과 폐쇄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비환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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