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이젠 정말 버려야 할까봐.” 나는 꽤나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핑크색 플로피디스켓 석 장을 손에 쥔 채였다. 구식 디스켓를 읽어낼 컴퓨터도 없었지만 나는 그걸 버리지도 못하고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갖고만 지냈다. 이 십대를 지나면서부터 써온 서툰 소설들이 그 안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과거와 결별할 생각이라도 한 여자처럼 단단한 얼굴을 하고 말했지만 그걸 미련으로 잘못 알아들은 친구는 플로피디스켓을 읽어낼 장치를 챙겨왔다.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난감해서 “응, 나중에 해볼게” 대답하고 말았다. 디스켓에 쓰인 날짜들을 셈해 보니 약 3년간의 소설이었다. 그러니 아마 열다섯 편쯤 될 것이었다. 첫 소설은 제목뿐 아니라 첫 문장도 기억이 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소설도 그렇지만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헛갈린다. 디스켓을 열어본다 한들 그 중에서 써먹을만 한 것을 찾아내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소설들을 쓰다가 기숙사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맞던 순간과 내 스탠드 불빛 때문에 잠을 설치던 룸메이트가 슬그머니 가방 앞 주머니에서 꺼내주던 초콜릿 바와 “뭘 시간 아깝게 이딴 걸 소설이라고 쓰고 야단이냐!” 면박을 주던 교수님의 목소리와 또 그게 서러워 친구들 붙잡고 학교 앞 선술집에서 소주를 발칵발칵 마시고 통곡을 했던 시간들이 아까워 나는 여태 버리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디스켓 안에 든 건 원고 뭉치가 아니라 내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증거품들이었다. 여러 번 꼭 쥐어본 후 나는 휴지통에 가만히 버렸다. 어떤 증거는 물건으로 남고 어떤 증거는 기억에 남으므로 버리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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