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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가 민족사학의 태두? 민족에 회의 느껴 무정부주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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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가 민족사학의 태두? 민족에 회의 느껴 무정부주의 변신”

입력
2017.02.0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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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역사학자모임이 낸 冊서

‘단재의 단재 비판’을 조명

“저항도구로 민족을 내세울수록

일제 정당화하는 점 깨닫고 변해”

강렬한 민족주의 역사학자로 기억되는 단재 신채호. 그러나 단재 스스로가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렬한 민족주의 역사학자로 기억되는 단재 신채호. 그러나 단재 스스로가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28년 대만에서 체포만 되지 않았던들, 단재의 단재 비판은 더 날카로워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해 계간지 역사비평의 ‘사이비역사학’ 규정으로 시작된 강단ㆍ재야사학계의 고대사 전쟁에서 큰 전제 가운데 하나는 ‘두계 이병도 vs 단재 신채호’다. 일제 주도의 조선사편수회 따위에 얼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중국 답사를 다녔다는 단재는 ‘민족사학의 비조’로 꼽힌다. 그러나 정말 그러 했을까.

지난해 고대사 전쟁을 주도한 ‘젊은역사학자모임’이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역사비평사)을 내놨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단재의 단재 비판’을 조명한 권순홍 성균관대 박사의 글 ‘민족주의의 표상, 신채호 다시 생각하기’다. 권 박사는 이 글에서 단재 신채호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민족주의 사학에 심취한 건 맞지만, 이후 자신의 논리가 결국 일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사회진화론의 일그러진 형태임을 깨닫고 이를 버리려 했다고 주장했다.

출발점은 민족 위에 국가를 설정한 19세기 독일 법학자 요한 블룬출리의 논리였다. 이 논리는 근대민족국가 수립 열망에 휩싸여 있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양계초를 비롯, 조선과 일본 양국의 왕실과 관료들이 블룬츌리의 논리를 배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국가가 먼저요, 자유와 평등 같은 얘기는 그 다음이라는 우리식 민족주의 논리의 오랜 기원이기도 하다.

단재 또한 바로 이 영향 아래 있었다. 단재에게 블룬츌리의 논리는 “제국주의 열강에 국가는 빼앗길지라도 민족은 그 존재와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대안적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국가와 구분되는 새로운 역사주체로서의 민족”은 “봉건적 중화주의를 해체하는 길이자 제국주의 폭력에 대항하는 길”이기도 했다.

1923년 1월 단재가 쓴 '조선혁명선언'. '민족'에서 '민중'으로 옮겨간 단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23년 1월 단재가 쓴 '조선혁명선언'. '민족'에서 '민중'으로 옮겨간 단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렇게 주어지면, 남는 방법은 ‘우리 민족 또한 국가를 이룰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증명이었다. 고조선과 단군 등에 대한 강조, 중국 문명의 강한 영향력에 대한 무시 등 ‘독자적인 민족국가의 계보’는 이를 위해 만들어졌다. 단재에게 역사가의 임무란 “새로운 역사 주체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민족의 운명을 추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과 다른 우리만의 독자적 민족 계보를 만들려 하니 타민족과의 투쟁을 강조하게 됐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유명한 구절은 그 결과물이다.

그래서 단재를 ‘근대역사학, 혹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태두’라고만 부르는 것은 양날의 칼이다. 단재 스스로가 이 틀에서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 들어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하는 것이 한가지 예다. 민족, 민족간 경쟁, 민족의 흥망성쇠를 강조할수록 사회진화론에 빠진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사회진화론 입장을 강조하면 할수록 “강자인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약자인 한국이 식민지배를 받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실제 단재는 1920년대 글 ‘위학문의 폐해’에서 약육강식의 구도로 쓰인 정치, 역사, 학설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렬한 민족주의자에서 모든 정부의 지배체제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로의 변신은 당혹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변신을 한 데 꿰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기세”다. 저항의 도구로 처음엔 ‘민족’을 내세웠으나 그게 결국 일제의 도구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달았고, 그 대신 집어 든 것이 ‘민중’이었다. 무정부주의자로서의 변신은 거기서 나왔다.

아나키즘에 경도된 뒤 단재의 역사서술은 크게 변한다. 1910년대 쓰인 ‘조선상고문화사’에 비해 1924년 쓰인 것으로 보이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단군의 역사는 비중이 크게 축소되고, ‘조선사연구초’ 등에서는 위대한 상고사를 담았다고 하는 ‘천부경’ ‘삼일신고’ 등 대종교 계열 서적들을 위서(僞書)라 비판하기도 했다.

권 박사는 이런 흐름을 “1910년대와 달리, 목적론적 민족주의에 회의를 느꼈을 1920년대의 신채호가 기왕의 견해들을 고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실제 그 변화가 어디까지 갔을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다만 “1928년 자금 조달 활동을 벌이다 체포됨으로써 그의 연구가 끊어지게 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렇게 보면 재야사학계가 ‘민족사학의 비조, 단재’라고만 설정해두는 것은 “신채호에 대한 배타적 독점과 굴절된 전유에 다름 아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권 박사는 “단재의 아나키스트로서의 변신에 대한 이런 설명이나 해석들이 실제 단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단재를 ‘민족주의 역사학자’로만 기억하는 것은 단재에 대한 올바른 독해도 아닐 뿐더러,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놓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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