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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어른놀이

입력
2017.02.0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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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이십대 후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다소 이르게 부르다가 “아직 서른 되려면 멀었다, 이 자식아.” 면박을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을 들으면 눈물이 찔끔 나고야 마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건망증처럼 시간은 깜빡깜빡 나를 지나쳐 간다. 책 한 권 번역을 마치고 역자후기까지 다 써서 보내고 나니 4개월이 또 훌쩍 지나가 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라고 나는 혼자 투덜거렸다. 며칠 전부터는 배에 깨알만 한 것이 잡히더니 금세 완두콩만 해지고 또 강낭콩만 해졌다. 생각해보니 요사이 나는 겁도 많아졌고 쉽게 풀이 죽고 짜증도 늘었다. 별 거 아닌 걸로 화도 잘 내고 또 별 거 아닌 걸로 미안하단 말도 자주 한다. 말하자면 시간의 무게에 좀 쫄아 있다는 거다. 인생의 한 다리를 건너갈 때면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를 게 없단 것을 알지만 숱한 다리들을 건너왔음에도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 든다. 나는 아직 어른놀이가 재미있지도, 익숙하지도 않은데 나이는 숨길 수가 없으니 어색할 밖에.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고 그냥 처박아두었던 보이차 단지를 꺼냈다. 선물 받은 지 십 년이 된 차다. 알고 보니 보이차는 십 년이 되어도 마실 수 있는 거란다. 단지 안에서 십 년을 묵은 까만 찻잎을 한줌 꺼내 전기 티포트에 넣었다. 썩지 않고 십 년을 보낼 수 있는 힌트를 나에게 좀 주려나. 지레 주눅이 들어 다녀온 병원에서 의사는 강낭콩만 한 그걸 만져보더니 “곪은 거예요.” 무심히 말한다. 주사기로 고름을 빼내느라 붉은 구멍 자국 하나가 생겼다. 보이차 끓는 소리가 다정한 오후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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