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 펼쳐보는 얇은 책이 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19년 뮌헨대학에서 정치의 의미와 정치가의 역할에 대해 강연했다. 이 강연이 바로 ‘직업으로서의 정치’다.

정치에 대한 고전적 탐구인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베버의 이해다. 그는 정치를 국가의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으로 정의한다. 국가들 간에든, 국가 내 집단들 간에든 권력에 참여하려는 노력 또는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력이 정치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베버의 독해다. 그에 따르면 근대 민주주의는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인 동시에 ‘지도자 민주주의’다. 그는 특히 지도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정당이 가진 추상적 강령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개인적 헌신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은 평범한 이들에게 이념적 보상을 제공해 주며, 이러한 이념적 보상은 추종자들의 중요한 행위 동기 중 하나”라고 그는 말한다. 민중 못지않게 지도자를 중시한 베버의 이해는 적잖이 뜻밖이지만, 21세기 현재에도 관찰할 수 있는 정치 리더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을 지켜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현실주의적 독해에 공감할 수도 있다.

둘째는 정치가의 자질에 대한 베버의 주장이다. 그는 ‘열정ㆍ책임감ㆍ균형감각’을 정치가가 갖춰야 할 세 자질로 제시한다. 열정이 정치적 대표성에 헌신하려는 태도를 말한다면, 책임감은 그 정치적 대표성에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를 지칭한다. 이러한 열정과 책임감 사이에 요구되는 게 균형감각이다. 균형감각은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 즉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고 그는 덧붙인다.

베버에게 정치 영역에서 가장 치명적인 두 죄악은 객관성의 결여와 무책임성이다. 정치가가 객관적 조건은 도외시한 채 주관적 판단에만 의존하고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정책을 추진할 경우 그 정책이 국민 다수에게 불행을 안겨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열정ㆍ책임감ㆍ균형감각은 더없이 중요한 자질인 셈이다.

셋째는 정치와 윤리에 대한 베버의 통찰이다. 그는 정치의 본질 중 하나가 악마적 세력과 계약을 맺는 데 있기 때문에 정치적 행위가 가져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점에 주목해 그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구분한다. 신념윤리가 선과 악의 구별에서 도덕적인 선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뜻한다면, 책임윤리는 정치적 결정의 결과에 대해 무제한적 책임을 지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가는 신념윤리뿐만 아니라 책임윤리까지 갖춰야 한다. 정치적 의사 결정이 국민에게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을 고려할 때 책임윤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정치에 대한 베버의 이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론은 무엇보다 엘리트주의에 기울어져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분석이다. 정치가라는 직업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베버가 강조하듯 정치가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과는 구분되는 자기만의 덕목을 요구한다. 미래학은 이제 막 열리는 인공지능 시대의 노동시장 변동에서 정치가라는 직업이 오래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정치는 우리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열정과 합리적이고 냉정한 균형감각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일 터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이번 대선에서 불출마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예견된 수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가는 전문적 직업이다. 그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선 상당한 훈련이 요구된다. 이른바 ‘정치적 근육’은 산전수전(山戰水戰), 간난신고(艱難辛苦), 새옹지마(塞翁之馬)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단단해질 수 있다. 기성정치에 대한 환멸을 드러낸 반 총장의 불출마 변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마음을 추슬러 앞으로 우리나라 외교 발전에 기여해 주길 바란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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