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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칼럼] 예술은 예술, 정치는 정치

입력
2017.01.26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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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고야가 ‘옷 벗은 마하’ 그림을 내놓았을 때 유럽 문화계는 그의 그림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신성모독이다, 외설이다, 말도 많았다. 그 전 여성의 누드 그림들이 신화 속 인물들을 차용해서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이라는 면죄부를 받았지만 어떤 신화적 모티프와도 상관없는 등신대의 지극히 현실적인 여성 나체화가 보수적인 평단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다. 결국 거센 비난을 받은 3년 후 ‘옷 입은 마하’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조신하게 바꾸어 놓았지만, 1813년 외설, 이단이란 제목으로 일종의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마네의 1863년 벌거벗은 여인과 양복 입은 신사가 함께 앉아 있는 ‘풀밭 위의 식사’, 1865년 나체 여인을 그린 ‘올랭피아’ 역시 비슷한 항의를 받았다.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패러디한 그림이지만, 머리띠, 고양이, 머리에 꽂은 난초, 흑인 여종, 치골 위의 손가락 등이 현실세계의 팽팽한 성적 긴장감을 도발했기 때문에 여성으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는 평도 들었다. 에밀 졸라 같은 문인이나 세잔, 고갱 등 화가들은 이 그림을 역사적인 명화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많은 사람이 그 그림에 침을 뱉었다.

20세기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에곤 실레의 누드 그림과 관련된 소동은 마침내 화가를 감옥에 가두게 만들었다. 실레의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누드 자화상들은 남자가 자신의 몸을 그렇게까지 리얼하게 묘사한 전례가 없기 때문인지 많은 이에게 불쾌감을 자아냈다. 게다가 그의 스튜디오에 꽤 많은 반항적인 젊은이들이 모여들어서 재판부가 청소년에게 포르노그라피를 보여 주었다는 죄로 화가를 구금했다. 이 일은 실레에게 큰 상처가 되고 얼마 후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을 때 임신한 아내와 함께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들이 들어야 했던 비난의 말들은 표면적으로는 ‘점잖지 못한 외설’이지만, 실제로는 과거를 답습하려는 보수적인 화단과 감상자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저항, 또 창조적인 길을 가려는 이들에 대한 질시가 더 크다. 외설적인 이미지에 대한 논쟁은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서 화상을 입고 알몸으로 도망치는 여아를 찍은 닉 우트의 ‘네이팜 소녀‘란 역사적인 사진도 비켜가지 않았다. 누드를 신문에 실을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었고, 이후에도 어린 소녀란 점 때문에 두고두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시각예술뿐 아니라 문학도 마찬가지다. 고전이 된 데카메론, 엘로이즈, 캉디드, 로리타 같은 책들도 발표 당시에는 사회적 윤리를 깨는 해로운 책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책 좋아하는 정조가 사물을 묘사한 박지원의 문체를 문제삼을 정도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결국 18세기 진경산수, 실학, 서학 등 우리 정신사의 자유로운 성취는 19세기에 이르러 퇴행해 버리고 만다.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럽의 화단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자연과학 예술, 모든 면에서 새로움을 추구한 일본문명에 비해 경쟁력이 끝없이 추락해 버린 것이다. 그와 같은 우리 사회의 보수성이 결국 세계사에서 우리를 뒤처지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올랭피아와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 전시되어 이런저런 논란이 되고 있다. 자식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이냐, 여성들을 모욕했다 라는 말들도 한다. 보는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자유다. 나라면 그런 그림을 국회 전시관에 걸면 괜히 복잡해진다고 말렸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과 맞서서 신념대로 살아가는 예술가들에게 세상과 타협해서 사는 나 같은 이들의 비겁한 인생관을 강요한다면, 모욕이자 폭력이 된다.

미적 성취의 높고 낮음을 떠나 마음 가는 대로 자기를 표현하는 예술가들은 일상의 비루함에 갇혀 좀비가 된 보통 사람들에게 권태로운 삶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와 고통 속에 숨은 의미를 알려 준다. 예술에 대한 테러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고 장관과 수석까지 구속한 마당에 예술 작품을 자신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훼손하거나 예술가들을 억압한다면 앞뒤 논리가 맞지 않는다. 실제로는 지극히 비도덕적인 사람일수록 죄 없는 예술가나 작품에 극단적인 도덕률을 강요하기도 한다. 본능에 휘둘리는 자신의 어두운 무의식 세계는 부정하고 남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일수록, 내 안의 문제는 보지 못하고 남들에게서 잘못을 찾는다. 스스로의 영혼이 황폐하고 공허하기 때문에 대신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비난하고 조종하려는 데 인생을 거는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의 무가치감과 무의미함을 잊을 수 있으니까. 세상에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질투로 남들이 해 놓은 것을 무조건 깎아 내리는 이들이 있다. 악성 댓글 부대건, 예술작품을 훼손시키고 예술가들의 발에 족쇄를 채우는 이들이건, 그저 세상을 흉흉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작품이 이로운지 해로운지, 쓰레기인지 높은 성취인지는 감상하는 이들 각자가 결정할 일이지, 폭력을 휘두를 일은 아니다.

이나미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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