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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존경해온 두 지식인이 최근 세상을 떠났다. 지그문트 바우만과 박세일이 그들이다. 그 동안 나는 두 사람의 담론에 대한 에세이를 더러 써 왔다. 이 칼럼은 이들의 삶과 사상을 돌아보고 기리는 개인적 추모의 글이다.

바우만은 현대성을 다룬 우리 시대 최고의 사상가다. 그는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변화와 불확실성에서 찾았다. 변화가 유일한 영원성이라면, 불확실성은 유일한 확실성이라는 자신의 사유를 그는 ‘액체 현대(liquid modernity)’라 명명했다. 가치든 제도든 모든 견고한 것들이 이젠 종착점을 알 수 없는, 끝없이 유동하는 것들로 바뀌는 시대가 바로 우리 시대라는 게 그의 사회학적 메시지다.

유동하는 현대성의 그늘을 그만큼 날카롭게 분석한 이는 없다. 이를테면, “현대화는 잉여 인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이로 인한 사회적 긴장 또한 유발하지요”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잉여’로서의 ‘쓰레기가 되는 삶’을 비판했다. ‘우리는 각자 존재하고 나는 홀로 소멸하게 된다’는 무기력과 고립감과 두려움에 대한 그의 통찰, 다시 말해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각자도생(各自圖生)’에 대한 그의 사회학적 해부는 비록 비관적이더라도 승인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계몽을 내게 선사했다.

박세일은 이론가라기보다 경세가(經世家)라 부를 만하다. 경세가란 학문과 정책을 동시에 담당하는 사람, 전통사회 사대부와도 같은 존재를 말한다. 뜻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면 세상에 나아가 경륜을 펼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 학문 연구에 전력을 다하는 이가 경세가다. 그는 ‘선진화론’을 제시한 학자인 동시에 정책기획수석비서관ㆍ국회의원ㆍ정당 ‘국민생각’ 대표 등의 이력에서 볼 수 있듯 정치가였다.

선진화론은 그가 평생을 거쳐 구상하고 주조한 경세 담론이다. 그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어 선진화가 국가발전의 새로운 목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진화론을 이루는 세 아이디어는 국가 비전으로서의 선진화, 철학으로서의 ‘공동체 자유주의’, 발전전략으로서의 ‘서울 컨센서스’ 10대 전략이다. 그는 개발독재론에 의존해 온 보수세력에게 새로운 정치적·정책적 상상력을 제공한 ‘숨은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선진화론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율곡의 경장론(更張論)을 떠올리게 하는 공동체 자유주의의 부국덕민(富國德民)에 대한 그의 사유로부터 나는 작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우만과 박세일이 보여준 지식인의 두 가지 길이다. 지식인은 그 역할에 따라 ‘보편적 지식인’과 ‘참여적 지식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보편적 지식인이 진리 탐구와 권력 비판을 추구한다면, 참여적 지식인은 비전 제시와 정책 개발에 주력한다. 아카데미즘이 보편적 지식인의 존재적 기반이라면, 앙가주망은 참여적 지식인의 실천적 규범이다. 조국 폴란드에서 추방당했던 유태인인 바우만이 현대성 탐구를 통해 보편적 지식인의 길을 걸어 왔다면, 격동의 우리 현대사를 함께 해온 박세일은 보수적 개혁 담론을 통해 참여적 지식인의 길을 선택해 왔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지식인에게 부여된 역할을 어느 하나로 규정짓기 어렵다는 점이다. 지식사회도 이제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고도로 분화돼 있다. 대학, 공공 및 민간연구소, 언론·비정부 기구를 포함한 사회단체 등에서 볼 수 있듯 지식인들의 제도적 거점은 다층화돼 있다. 오늘날 21세기에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은 시대적 컨텍스트 속에서 재해석될 수 있고, 전공 및 분야에 따라 다양하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진리 탐구와 현실 참여에서 각각 우리 시대를 대표했던 두 지식인인 바우만과 박세일의 왕성한 활동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컴퓨터 옆에 놓아둔 바우만의 대담집 ‘사회학의 쓸모’와 박세일의 역작 ‘선진 통일 전략’의 이곳 저곳을 들춰보고, 바우만이 꿈꿨던 자유와 평등의 현대성과 박세일이 소망했던 선진화된 대한민국을 생각해보고 있다. 두 사람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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