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흥 대한체육회장. 뉴시스

제43대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색깔을 가장 선명하고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이른바 ABC정책이다. 공화당 소속인 부시 대통령은 2001년 1월 취임 이후 민주당 빌 클린턴 전직 대통령이 입안한 정책과는 ‘무조건 반대’로 하겠다는 의미로 ‘Anything But Clinton’카드를 꺼내 들었다. 클린턴이 추진한 것이라면 모두 뒤집겠다는 ABC정책의 결과는 어땠을까. 대표적인 사례로 대북한 정책 실패를 꼽을 수 있다. 부시 행정부의 일방적인 북한 옥죄기는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재촉하는 역작용으로 나타나 참혹하리만치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다.

한반도로 수입된 ABC정책은 이명박 정권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만 아니면 된다’는 ABR(Anything But Roh)로 귤화위지한 것.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부의 것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사이 국민들의 혈세만 축났음은 한국과 미국이 다르지 않았다.

이기흥 회장이 이끄는 통합 대한체육회가 출범 100일을 넘겼다. 이 회장은 김종 전 문체부 2차관과 대립각을 세우는 전략으로, 체육인들의 표심을 얻어 당선됐다. 급기야 문체부와 김 전 차관이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됐음이 폭로되자 이 회장은 최순실로 ‘오염된’체육계를 정화시킬 대안으로까지 인식됐다. ‘걸림돌’이 제거되자, 이 회장의 언변과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회장 직속으로 각계 ‘명망가’ 12명으로 구성된 미래기획위원회를 신설해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앉혔다. 창설 100주년을 불과 2년 앞둔 대한체육회에 전례가 없는 위원회 규모와 인선으로 많은 뒷말이 쏟아졌다. 실제 법무장관 이외에 전직 국정원 2차장, 감사원 감사위원, 부장판사, 기재부 차관, 지방경찰청장 등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체육인 출신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체육인은 쏙 빠진 채, 스포츠 문외한들이 한국 체육의 혁신과 미래비전을 기획하겠다니…. 파천황적인 발상의 결과물이 사뭇 궁금하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로 만신창이 된 문체부 역시 체육회 앞에 바짝 몸을 낮췄다. 문체부는 경기단체에 직접 교부하던 3,700억원에 달하는 예산과 집행권을 체육회에 통째로 넘기는 결단으로 달라진 체육회의 위상 강화에 기여했다. 대한체육회 사상, 거액의 뭉칫돈이 굴러들어오는 ‘대호황기’가 아닐 수 없다. 탄력을 받은 이 회장은 최근 사무총장과 선수촌장, 이사진 21명을 새롭게 발표하면서 제40대 집행부 인사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면서 지난 16일 제1차 이사회를 주재해 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 양 단체 통합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은 체육인을 구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굽은 것은 바로 펴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내면을 뜯어보면 마냥 환호작약할 일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성폭력과 입시 비리, 승부 조작 등으로 대표되는 4대악 척결로 중징계 받은 이를 구제하겠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필칭 ‘체육인 대사면’이다. 체육 단체를 가족 기업화해서 사유화하는 적폐를 막기 위한 임원 임기 제한도 손보겠다고 공언한 것은, 기존 문체부의 정책과 정 반대의 길을 가겠다는 ABC의 그림자다.

이기흥 회장은 체육인 출신이 아니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봉사’하기 위해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다. 2004년 카누연맹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초심을 잃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희생과 헌신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체육회 통합과정에서 자신을 탄압한 문체부가 밉다고 정책을 고스란히 구시대 버전으로 되돌리겠다는 것은 한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집행부 인선에서도 “체육인 홀대”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선수촌장을 비 체육인으로 선임한 것은 오기와 불통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무너진 체육인들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겠다는 공약이 당선 석 달 만에 허언이 돼서야 되겠는가.

최형철 스포츠부장 hcc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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