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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다변(多辯)이 독이 될 때

입력
2017.01.1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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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소녀상 문제가 드러낸 우리 약점

정치권 외교ㆍ안보 언급도 잦고 거칠어

국민정서 편승하는 대신 이끌 각오해야

“이게 나라냐?”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소녀상이 설치됐다가 철거되고, 시민단체의 잇따른 항의로 다시 설치되는 과정을 두고 한 네티즌이 던진 물음이다. 많은 찬성 댓글이 달렸다. “그래, 맞아. 나라도 아냐. 나라가 앞장 서서 일본의 반인륜적 범죄를 알리지는 못할 망정, 시민단체가 애써 세운 소녀상을 철거하러 들다니, 쯧쯧!”.

똑같은 물음은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하야를 촉구한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당시에는 내심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이번 부산 소녀상 문제에는 다르다. 두 가지로 나누어 답하고 싶다.

첫 번째는 “아니, 그게 나라다”이다. 우선 소녀상 철거는 부산 동구청의 행위여서, 이로써 나라 꼴을 따지는 게 잘못이라는 뜻에서다. 또 나라는 국민 마음을 살피는 것 못지않게 국제사회에서의 품격을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의미에서다. 정부가 부산 소녀상 문제에 아무런 역할을 못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혹시라도 정부가 물밑에서 실질적으로 개입했다면, 나라 품격을 지키려는 노력은 합당했다. 나랏일을 기초단체의 민원처리처럼 할 수야 없다.

또 하나의 대답은 “그래, 나라도 아니다”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부산 소녀상 설치가 빚을 대일 관계 혼란을 뻔히 알면서도 1년 가까이 끌어온 문제에 나라가 아무런 대응을 못했다. 물론 이 문제에 나라가 공개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대로 된 나라라면, 시민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기념공원’ 등 다른 공간에 소녀상을 세울 수 있도록 유도하는 등의 ‘노력’은 해야 했다. 부산 시민단체가 소녀상 설치 시점을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 1주년(12월 28일)으로 잡은 것으로 보아 사전협의의 유효성은 의문이지만, 최소한 그런 흔적만 뚜렷이 남겼어도 일본 정부의 노골적 역공은 차단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나라가 아닌’ 이유는 이 문제에 대한 정치권, 특히 장차 나라와 국민의 운명을 걸머지겠다는 대선주자들의 반응에서 두드러진 무책임성이다. 이들은 앞을 다투어 집권하면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겠다, 10억엔을 돌려주겠다고 외치고 있다. 유권자 지지를 먹고 사는 정치인에게 국민정서처럼 중요한 게 없다지만, 국회의원도 아닌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그런 정서에 편승하기보다 나라 꼴 전체를 살피는 균형감각과, 때로는 국민정서를 합리적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을 보여 마땅하다.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일찌감치 한 수 제쳐두었던, 일본 유력 정치인의 “돈 떼어 먹힐라”는 조롱이 “돈 돌려주면 그만 아니냐”는 즉흥적 반응을 불렀겠지만, 정치인이라면 10억엔이라는 액수가 위안부 합의의 본질일 수 없음은 분명히 알았을 만하다. 이미 피해자 개개인에 3억원 가까운 지원이 이뤄진 마당이고 보면, 액수가 아니라 ‘일본 정부 예산’이라는 자금출처에 의미가 있었다.

물론 집권 후 대일정책을 전면 재검토, 위안부 합의 자체를 폐기할 수는 있다. 양국 정부의 정치적 약속일 뿐이어서 조약이나 협정처럼 폐기 절차가 복잡하지도 않다. 다만 그 경우에도 대일 관계의 부작용은 물론이고, 국제적 신인도 저하에 따라 새 정부의 대외적 약속이 좀처럼 무게를 갖기 어려우리란 부(負)의 효과에 대한 냉철한 고려와 분석을 거쳐야 한다. 그러니 그때까지만이라도 공연한 오해만 부를 ‘말 대포’는 자물쇠를 걸어두는 게 낫다.

정치권의 다변(多辯)은 상대가 있는 외교ㆍ안보 분야에서는 독이 되기 십상이고, 사드와 소녀상 문제로 중일 양국이 양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런 때다. 양국 모두 국정공백 와중에 외교 당국이 외톨이가 되어버린 우리 약점을 사정없이 파고 들고 있다. ‘손자병법’은 ‘전쟁은 국가 생사가 걸린 대사라서, 적과 나의 우열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며 가장 먼저 ‘도(道), 즉 백성과 군주의 뜻이 같은지(道者, 令民與上同意者也)를 살피라고 했다. 외교는 정치(내치)의 연장이고, 전쟁은 외교의 특수한 수단이라지 않던가.

주필/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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