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인터뷰] 보수가 진단하는 보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한국의 보수는 변화 필요성 무시…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주를 억압
나라의 주인임을 각성한 국민들 촛불로써 정치의 생산자 역할
광장 정치는 마지막 수단… 진짜 보수는 끊임없이 변화해야”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한 신년기획 인터뷰에서 "보수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하지만, 한국의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이를 무시해왔다"고 지적했다. 김주성 기자 poem@hankookilbo.com

2년 전 ‘세월호 참사’ 때 우리는 물었다. “국가가 왜 존재하는가”. 그 질문은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 앞에서 “이게 나라냐”는 자조로 바뀌었다. 참담한 역사의 퇴행은 정치권, 특히 보수를 요동치게 만들고 있다. 자식을 차가운 바다 속에 남겨두고 피울음을 토하는 부모에게 “지겹다. 그만하라”며 망각을 강요한 것도, 대통령의 헌정 유린으로 타오른 촛불을 두고 “바람 불면 꺼진다”고 조롱한 것도 스스로 보수라 말하는 집단이었던 까닭이다.

세밑이었던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편집국을 찾은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한국에 보수는 없었다”고 단언했다. 현 상황도 보수가 아닌 ‘수구의 몰락’이라고 진단했다. “보수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하지만 한국의 보수는 그간 이를 무시해 왔다.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되레 자유민주주의를, 공공성과 법치주의를 파괴하고 권력을 사유화했다.” 내가 나라의 주권자이며, 내가 움직여야 국가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100만 촛불’의 각성으로 보수정권의 위기와 보수당의 분당까지 초래했지만, 어찌 보면 예정된 몰락이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여야를 넘나들어 대선 주자들의 ‘멘토’, ‘책사’로도 통하는 윤 전 장관은 서류 가방에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닌다. “학생 250명이 한꺼번에 희생된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공직에 오래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이 참사가 던진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초유의 사태가 꼬리를 물었던 2016년을 정의한다면.

“하나의 고비를 넘는 해였다. 4ㆍ19 혁명과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6ㆍ10 민주항쟁에 이은 대규모 시민 항쟁이 일어났다. 정치를 상품시장에 빗댄다면 소비자는 국민, 정당은 생산자인데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생산자 역할을 했다. 국가가 정상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국민이 주권을 행사해 정치를 이끌었다. 그런 점에서 2016년의 의미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가의 정상성(正常性) 모색으로 볼 수 있다.”

-기록적인 촛불 수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각성이다. 무슨 각성이냐. 첫째 ‘아, 내가 나라의 주인이네’하는 각성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평소에는 그런 자각을 하지 못하지 않나. 둘째는 ‘내가 움직이니 나라가 바뀌네’, 또 하나는 ‘내 삶이 이렇게 피폐해진 게 구조의 문제네’하는 각성이다. 광장에서 시민들이 국가를 구조적으로 바꾸라고 요구한 것이 그래서다. 100만 촛불은 이런 세 가지 각성을 통한 국민 ‘전체 의지’의 폭발이다. 그런 반면 ‘광장의 딜레마’도 있다. ‘광장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다. 어떻게 해도 안 될 때 마지막 수단으로 시민이 광장에 나와서 항쟁을 하는 것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일상화되면 위험하다. 모든 국정을 다 촛불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사건들은 보수의 정체성 위기로 귀결됐다. 보수란 과연 무엇인가.

“요즘 보수를 일컫는 말들이 홍수처럼 범람하더라. 보수의 개념도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국가, 이 두 가치를 지키는 게 보수가 됐다. 그런데 보수라고 해서 정체성이 돌덩이처럼 굳어 있는 게 아니다. 영국 보수주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버크가 이런 말을 했다. ‘소나무가 늘 푸른 이유는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잎을 끊임없이 바꾸기 때문이다.’ 보수도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는 그간 이를 무시해 왔다.”

-그래서 보수가 몰락한 건가.

“엄밀히 말하면 이건 보수의 몰락이 아니고 수구의 몰락이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가 ‘한국 정치는 사이비 보수와 사이비 진보의 극한 대립’이라는 표현을 쓴 걸 봤는데, 정확한 진단이다. 그간 한국의 보수를 자처한 이들이 무얼 했나.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탄압했다. 국가의 핵심이자 공동체를 묶어 주는 가치는 공공성이다. 그런데 역시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공공성과 법치주의를 파괴했다. 그리고 권력을 사유화했다. 어떻게 보면 그 세력의 몰락이 굉장히 늦었다.”

-수구의 몰락이 결국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의 업보란 얘기 같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임 때 ‘나는 대한민국이란 기업의 CEO’란 말을 한 적이 있다. 국가와 기업을 동일시하고, 대통령과 CEO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의 머릿속엔 민주주의나 공화주의가 없었다. 우리가 국가와 기업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가졌던 것이다. 내가 박 대통령이 당 대표를 할 때부터 일관되게 비판했던 게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즉 권위주의 리더십이었다. 10대 때 본 아버지(박정희)의 모습을 모델로 생각했을 테니까. 혹시라도 대통령이 되면 시대와 충돌할 게 뻔해 개인도 나라도 불행해지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국정수행 능력이 형편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김주성 기자 poem@hankookilbo.com

-새누리당에서 가칭 개혁보수신당이 떨어져 나왔다. 그들이 보수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보수가 있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될 수 있는 표현이다. 보수가 없었는데 무슨 개혁인가.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유혈혁명이 없었다. 왜냐. 영국의 보수는 국민이 10가지를 요구하면 12가지를 들어줬다. 때로는 국민이 요구하기 전에 먼저 줬다. 20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그런 변화를 지속해 법제화를 이뤘다. 우리 보수 세력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신당이 그 견인차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 당도, 한국의 보수도 미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실천할지가 중요하다. 어떤 희생이 있어도 실천하겠다는 굳은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한나라당, 새누리당의 쇄신파도 청와대에서 한마디 하면 쑥 들어가버리는 행태를 보이지 않았나.”

-진보 쪽은 어떤가.

“보통 우리가 민주화 운동 세력을 진보라고 하는데 그들 역시 권력을 잡은 이후 바로 수구화하고 기득권화했다. 그러니 민주화 세력의 도덕성도 국민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 게 아니다. 그러니 나라가 멍들 수밖에. 김대중정부를 진보 정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김대중ㆍ노무현정부 10년을 본다면, 그 기간 한국 정치가 달라진 게 뭔가. 결국 권력을 잡고 안 잡고에 따라 여(與)와 야(野)로 갈릴 뿐 본질적으로 같은 세력이란 걸 의미한다.”

-그럼 진보 세력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늘 진보의 가치로 보수에 도전하고, 보수는 또 진보의 도전을 받아서 자기를 바꿔나가야 한다. 그렇게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경쟁해야 한다. 보수 정권이 10년을 집권하면 모순이 쌓인다. 그러면 진보적 가치로 정권을 바꾸고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진보 정권도 마찬가지다. 모순 없는 권력은 없으니까. 진보와 보수가 그렇게 서로 자극이 돼야 국가가 발전한다. 그런데 우리 진보와 보수는 서로를 원수로 생각하니 문제다. 경쟁이 아니라 투쟁을 해 왔다.”

-진보의 가치는 무엇인가.

“2차 대전 직후 유럽의 진보는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는 모든 계층으로 확대됐다. 보수와 진보가 그래서 60년대 이후 중간 지대에서 만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일정한 시점에 국가에 유익한 가치를 선택하는 게 정치인 거다. 따라서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가치를 선택하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산업화 시대에도 노동의 역할이 아주 컸는데 그 시기를 평가하면서 박정의 리더십이나 경제관료의 헌신만 얘기하지 노동의 가치를 거론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이건 잘못이다.”

-구체제를 청산하려면 개헌이 답이라는 주장도 있다.

“87년에는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라는 합의가 있었다. 서울시청 광장을 꽉 메운 시민의 요구가 대통령 직선제 하나였다. 최소 강령에 의한 최대 동원이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은 최소 강령이 없이 최대 동원이 이뤄졌다. 대통령 하야는 헌법을 고치라는 요구가 아니다. 개헌을 한다면 어떤 걸 어떻게 고칠지 합의도 안 돼 있으니 간단치 않은 문제다. 정치권의 대선 전 개헌 주장도 국민의 상당수는 세력 재편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더 동의가 쉽지 않다. 후보들이 취임 뒤 개헌 구상을 밝히고 국민 동의를 받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예상되는 조기대선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대선 후보의 자질을 더욱 철저하게 검증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현재 각 정당이나 언론 주최의 후보 간 토론회 정도로는 제대로 인물을 가려낼 수가 없다. 박 대통령도 그런 검증을 거쳤지만, 국정수행 능력이 이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국민과 시민사회가 참여해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검증해서 이미지만 갖고 대통령을 뽑는 과오는 이제 없애야 한다.”

-대통령 당선자에게 바랄 게 있다면.

“다수 국민이 촛불을 들고 표출한 열망은 새 나라를 만들라는 것 아닌가. 누가 대통령이 되든 혼자 현재의 내우외환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지 말고 주변의 좋은 사람을 찾아 모아야 한다. 대통령이 정직하게 인재를 모으면 왜 인재가 없겠나. 안 써서 그렇지. 사적인 관계의 사람을 데려다 쓰는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 ‘고소영(고려대ㆍ소망교회ㆍ영남)’ 인사를 하니 MB정권 때는 인사가 망사였고, ‘수첩 인사’를 하니 현 정부 인사가 참사가 된 것 아닌가. 고위 공직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국가 권력을 대신 행사하는 자리다. 철저하게 공적 기준에 따라 적재적소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김주성 기자 poe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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