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길을 걷더라도 방향만 알면 두렵지 않다. 칠레 토레스델파이네국립공원에서 만난 표지판

여행 작가라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살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계획에 세워야 사는 사람도 있다. 서태지가 하여가를 부르던 시절 유행한 시스템 다이어리부터 프랭클린 플래너를 거쳐, 싱즈(Things)와 어썸노트, 워크플로위 등 온갖 일정관리 어플에 빼곡히 할 일을 적곤 한다.

뿐만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계획을 짠다. 하루에도 여러 번씩. 쉬는 날은 ‘오프 데이’라고 계획표에 적어놓는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수필 ‘메모광’을 보면 목욕탕에서 메모하지 못해 고통 받는 작가의 모습이 나온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목욕탕에서 문득 해야 할 일이 생각났는데 적어 놓지 못하면 얼마나 괴로운지.

아침에 눈 뜬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물을 한잔 마시는 일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하루 계획 세우기에 돌입한다. 신이 난다. 늦게 일어나서 계획 세우는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초조 불안 증세가 나타난다.

먼저 시간대별로 할 일을 적은 후, 꼭 해야 할 일 세 가지만 따로 포스트잇에 써서 모니터 옆에 붙인다. 세뇌 효과를 노리는 거다. 할 일을 하나씩 완료할 때마다 두꺼운 형광펜으로 시원하게 긋는다. 그 후련함이 얼마나 좋은지.

그러나 계획대로 진행될 리가 없다. 2시간이면 끝날 것이라 예상했던 일은 엿가락처럼 늘어져 5시간 걸려야 겨우 끝이 보인다. 오후쯤 되면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하루의 그림이 몇 번에 걸쳐 달라진다. 물론 다 실천하지도 못한다.

친구들은 그런 계획을 뭐하러 세우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시간 낭비 아니냐며, 계획 따위 치우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한다.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계획 짜기를 포기할 순 없었다. 모든 일은 ‘너 자신을 알라’가 중요하니까. 나에게 계획 세우기는 취미다. 그래서 계획을 다 달성하지 못해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획은 목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체가 목적이다. 계획을 짜는 것은 발가락이 간질간질해질 정도로 재미있다. 가끔은 무아지경에 빠진다. 어떤 하루를 보낼지, 일년은 어떻게 그릴지, 십년 후의 내 모습은 어떨지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행복하다.

단기 계획은 자주 바꾸지만, 장기 계획은 오래 유지하는 편이다. 같은 뜻을 오랫동안 품고 있으면 현실이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초 신문사 기자로 일할 때였다.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10년 안에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때 나는 언제나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 했고, 선배는 철인(鐵人)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말을 뱉어놓고도 “우리 참 허무맹랑해, 그렇지”라며 웃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후 돌아보니, 선배는 여러 차례나 철인 타이틀을 목에 걸었고, 나는 세계를 헤매고 돌아와 책까지 버젓이 내놓았다.

회사 친구 진호는 HR팀 소속이었다. 그는 틈틈이 1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그리곤 언젠가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비주얼싱킹에 관한 일을 할 거라고 했다. 회사에 있는 3층 카페에서 들은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한 것 같은데, 이미 그는 ‘철들고 그림 그리다’를 비롯해 여러 책을 내놓고 행복하게 사람들과 그림을 그리는 ‘행복화실’ 주인장이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숙성시킬 장기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 참나무처럼 단단해지기 위해 시간과 물이 필요하다는 것. 세월이 한참 지나고야, 인생의 비밀을 알게 됐다.

단기계획과 장기계획 사이에 다리도 있어야 한다. 나에게 그 다리는 12월마다 여는 부녀회 파티다. 다 모여 봐야 10명이 채 되지 않지만, 서로에게 100만 볼트 이상의 따뜻함을 안겨주는 친구들이다. 함께 모여, 올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새해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지 세 가지씩 이야기를 나눈다. 모호하던 일들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법처럼 이뤄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부녀회를 통해 사랑 가득한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서로의 에너지가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절감하곤 한다.

올해 광화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우리들은 내년에는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더 많이 만들어보기로 했다. 손을 잡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 한 해였으니까. 2017년 우리 모두의 화양연화가 펼쳐지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채지형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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