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 문화제를 하고 있다. 뉴시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추락한 국격을 국민의 촛불이 지탱하고 있다. 덕분에 검찰과 특검이 눈을 뜨게 되었고, 국회가 청문회와 탄핵으로 국민에게 응답했다. 대통령직이 농단 당하자 콘크리트 지지층은 균열을 일으켰고 신뢰는 맹목적이었음이 드러났다. 청와대의 침묵과 부인 일변도의 발표가 ‘양치기 소년’ 정도의 믿음이라도 주고 있을까. 무신불립(無信不立). 그래도 대한민국의 미래는 오늘의 위기를 어떻게 기회로 만드느냐에 달렸다.

탄핵으로 국가의 정상적인 흐름이 정지되었는데도 정작 게이트의 당사자는 자신 때문에 국민이 받는 참담함을 느끼지 못한다. 청와대는 근처에서 외치고 있는 촛불의 함성을 듣고는 있는가. 왜 저토록 하야를 외칠까. 그러나 세 차례의 담화와 간담회 발언, 그 뒤 인사 조처는 촛불민심에 맞서겠다는 심보만 비친다. 국민은 조기 퇴진하면 한 가닥의 연민의 동정이라도 표할 것으로 보지만, 그조차 걷어차 버리는 아집에 아연해한다.

청문회를 보면서 위기의 본질은 다른 곳에도 있음을 느낀다. 바로 수치심이나 죄의식의 결여다. 비서실장을 역임한 이라도 확실한 증거를 들이대지 않으면 ‘모른다’로 뭉개고, ‘아니요’로 뻗댄다. 입을 맞추지 못해 증언이 상치되어 한쪽은 분명 위증인데도 곧 드러날 진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짓은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없애버린다. 권력의 사유화는 여기에 기식하고, 사유화된 권력은 부패의 한계를 모른다. 마치 양파를 벗기듯, 한 꺼풀씩 벗길수록 드러나는 권력의 탐욕성은 서민에게 수치와 절망을 안겨 준다. 그런 속에서도 한두 사람의 용기 있는 증언은 진실의 불씨가 되고 사회개혁의 동력으로 활성화된다.

‘게이트’ 와중에 벌어진 한 재판은 위기의 한 축을 각인시켰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 검사장의 ‘공짜’ 주식 무죄판결은 법관이 국민을 능멸한 사례가 아닐까. ‘김영란법’까지 제정해 부패근절을 다짐하는데도, 법조인은 예외인 듯 청렴성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뭉개버렸다. 그 판결이 아무리 ‘법과 원칙’으로 포장된 소신이라 하더라도 국민의 법의식과는 너무 멀다. 그가 의지한 법의 정신이 과연 그랬을까. 그건 과거 친일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대의에 반해 친일파 재산을 지켜준 일부 법간(法奸)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선거무효 소송을 마냥 미루는 대법원의 처사나 선거소송에서 중요증거를 제척한 사례도 한통속이 아닐까. 그뿐인가.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며 법을 조롱하는 자들 또한 법간의 무리다. 우리 시대 위기의 큰 책임이 법조계에 있음은 분명하다. 탄핵 심판의 무거운 책임을 진 헌재는 이 위기 해소와 법조계 신뢰회복에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

아무래도 위기의 큰 책임은 집권당과 정부에 있다. 그럼에도 당정은 책임도 다짐도 진솔하게 고백한 적이 없다. “봉건시대의 주군에 대한 충성과 신의”로 얽힌 친박계는 “대통령의 정치적 노예”라고 비판받았다. 진정한 봉건적 관계라면 “주군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주군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主憂臣辱 主辱臣死)”는 말처럼, 죽음으로 실정의 책임을 대신 져야 했다. 그러나 주군이 탄핵당한 지금 각기 도생(圖生)만 시도한다. 이제 당정은 봉건적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국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받드는 진정한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함께 탄핵받은 정부도 전면개각을 단행하든지 국민의 지탄을 받는 각료를 교체하는 영단이라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위기 극복에 국민적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지금의 위기는 단순히 ‘탄핵’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게이트’로 훼손된 국가 시스템을 정상화하고, 국가안보 경제위기 국제관계 등도 다잡아야 한다. 어느 한 정권의 문제일 수 없다. 촛불민심은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강렬한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거기에 부응하여 갈등과 상처를 화해와 치유로, 분노와 분열을 평화와 통일로 승화시켜야 한다. 건전한 보수적 가치는 진보적 지향과 조화를 이뤄 실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럴 때 탄핵 위기는 나라를 더욱 성숙시키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ㆍ전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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