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데이비드 폴 맨쿠소

데이비드 맨쿠소는 고아원 시절 생일파티장보다 더 멋진 세상은 없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뉴욕 옥탑방 70평 작은 세계에서 그 꿈을 이루었고, 그 공간을 통해 수많은 댄스뮤직클럽의 포자들이 퍼져 나갔다. 그는 음악 안에서 모든 차별이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고, 돈과 명예보다 음악의 본질적인 것들을 가장 먼저 추구했던 근본주의자였다. 페이스북, thump.vice.com에서.
인생을 바꾼 고아원 생활

태어나면서 맡겨진 고아원

생일 뮤직파티 분위기에 흠뻑

음악ㆍ어울림을 평생 가치로

뉴욕 유티카(Utica)의 고아원 ‘성 요셉의 집’의 수녀 앨리샤(Alicia Donohoe, 1921~2014)는 ‘DJ 수녀’로 불리곤 했다. 음악가 집안에서 성장해 21세 때인 42년 수녀가 된 그는 2차대전 전시의 넘쳐나던 고아들을 위해, 누군가의 생일이면 언제나 음악파티를 열어주곤 했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마음껏 고함 지르고 춤도 추고 뛰노는 난장 파티. 모든 게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음악만은 공짜였고, 앨리샤는 그렇게라도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나이 든 수녀들이 질색을 하든 말든, 동요나 가스펠뿐 아니라 포크 탱고 라틴 맘보 차차차 할 것 없이 레코드를 돌렸고, 좀 자란 아이들은 듣고 싶은 곡을 신청하기도 했다. 인종과 피부색이 달라도, 종교와 문화가 달라도 상관없었다. 말도 못하고 아직 걸음마도 익히지 못한 아이들까지 거기선 하나였다.

그 아이들 사이에 데이비드 폴 맨쿠소(David Paul Mancuso)가 있었다. 아버지가 참전한 틈에 어머니가 바람 피워 낳은 아이. 1944년 10월 20일 태어난 그는 이틀 만에 고아원에 맡겨졌다. 5살에 어머니가 찾아와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고아원과 그 파티를 잊지 못했다. 집에서 늘 겪던 어른들의 다툼과 거친 욕설, 특히 인종주의적 말들. 어린 맨쿠소는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고 한다.

16세의 맨쿠소는 고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왔다. 공부 대신 길에서 구두를 닦아야 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마음껏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그 자유와 해방감이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더 셔를스(The Shirelles),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그 무렵 내 삶은 무척 불안정했지만 음악은 마음의 안정을 주곤 했어요. 음악은 치료제이자 에너지원이에요. 내 속에 에너지가 다 차오르면, 음악은 더 큰 힘으로 더 큰 것들을 치료하기 시작합니다.” 음악이 위안이나 도피처이기만 한 게 아니라 아득한 꿈이기도 했다는 말을 그는 2003년 3월 ‘디스코뮤직’ 인터뷰에서 저렇게 말했다.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된 지난 6월의 ‘레드 불 뮤직 아카데미 데일리’인터뷰에서는 저 말을 좀 더 살을 붙여 말했다. “당시(60년대)에는 시민인권운동이 한창이었어요. 동성애자운동 등 모든 운동이 솟구치던 때였고, 온갖 다양한 음악들이 온 사방에서 생겨나고 있었어요. 중립 지대(neutral place)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음악들과 함께 있는 거였죠.” 멋진 음악과 멋진 어울림, 그가 평생 추구한 두 가지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한창이던 62년 가을 처음 가본 뉴욕이 그가 말한 ‘중립지대’였다. 답답한 동네 유티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도시의 개방감과 사람들의 다양성. 당시만 해도 맨해튼 변두리는 휑했고 월세도 쌌다. 그 헐한 동네에서 그는 65년까지 3년 동안 스무 번도 넘게, 돈이 없어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는 인테리어 공사판에서 일했고, 자질구레한 유럽산 은제 골동품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65년 구한 집이 뉴욕 브로드웨이 647번지 옥탑방(Loft)이었다. 나무 마루에 약 70평쯤 되는 너른 창고 같은 공간. 주거용이 아니어서 공무원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침대며 취사도구를 감춰야 했지만, 그 곳은 고아원 놀이방 같은 이상적인 파티 공간이었다. 그는 친구들을 초대해 이따금 음악 파티를 열곤 했다. 와본 친구가 다른 친구를 초대하고, 함께 듣고 싶은 음반을 가져 오고, 술과 음식을 들고 오고…, 참가자가 늘고 소문도 나기 시작했다. 낮의 대학가와 뉴욕 거리는 연일 시위로 전쟁터 같았겠지만, 저녁 6시만 되면 텅 비는 도심의 주말 밤 그의 옥탑방은 새벽까지 음악과 불빛으로 흥성했을 것이다. 그는 돈이 모이는 족족 ‘분수’라는 것에 넘치게 좋은 오디오 기기들을 사 모았다. 매킨토시 파워앰프, 프리앰프, 두 대의 AR 턴테이블. 훗날 그는 “마치 내가 유년의 고아원 놀이방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 멤버들 중에 리처드 롱(Richard Long)이 있었다. 70년대 말 ‘거라지(Garage) 뮤직’이라는 독자적인 장르를 낳은 명성의 클럽 ‘파라다이스 거라지’의 사운드시스템을 구축한 오디오 디자이너였다. 그의 소개로 폴 클립쉬(Paul Klipsch, 1904~2002)가 갓 만든 하이엔드 클립쉬혼 스피커를 알게 되고, 음향 거장 알렉스 로스너(Alex Rosner)를 통해 어렵사리 한 쌍을 장만하고, 자신의 장비들과 연결하고…. 69년 말, 비록 로프트 월세는 밀리기 일쑤였지만 로프트 사운드만큼은 가히 뉴욕 최고라 할 만했다. 그 사연을 그는 마치 한 세계를 완성해가는 과정처럼 벅찬 어조로 자랑하곤 했다. 거리의 청년들이 거리에서 추구하던 이상을 그는 그렇게, 자신에게 허락된 최고의 음향장비들을 케이블로 이으면서 구축해갔다. 마침내 짝을 만난 기기들이 기량껏 토해내는 사운드를 처음 듣던 순간의 그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음악파티를 주말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로 정례화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70년 2월 14일, 토요일 발렌타인데이. 최초의 언더그라운드 뮤직 클럽으로 꼽히는 그의 ‘로프트 파티(Loft Party)’가 “Love Saves the Day”라는 타이틀을 달고 시작됐다. “사랑이 세월을 구원할 것”이라는 그 타이틀의 이니셜 ‘LSD’도 그들에게는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맨쿠소를 비롯한 그들 다수는 LSD의 대부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를 구루처럼 여기는 이들이었다.

뉴욕을 흔든 ‘로프트 파티’

첫 언더그라운드 음악 클럽

모든 장르를 최고 음질로 구현

댄스클럽 탄생ㆍDJ에 큰 영향

그의 로프트 파티는 철저한 비상업주의를 표방했다. 초대를 받으면 누구나 올 수 있고, 당연히 입장료도 없고, 술도 음식도 멤버십 카드도 팔지 않았다. 참가자들이 되는대로 내는 후원금이 입장료인 셈이었는데, 맨쿠소는 그 돈으로 월세와 전기요금을 내고 남는 돈으로 최신 음반을 사들였다. 말 그대로 렌트 파티(rent partyㆍ집세 마련용 파티)였다. 파티는 성황을 이뤘다. 그는 주류판매허가증도 카바레 등록증도 원치 않았다. “돈이 개입되면 타락하기 쉽다”고 여겨서였다. 훗날 그는 “(상업 클럽에서처럼) 물 한 잔에 5 달러, 술 한 잔에 10달러를 내지 않아도 된다. 술은 원하면 갖고 오면 된다. 나이 제한도 당연히 없었다.(…) 그 덕에 모두의 파티가 될 수 있었고, 그건 내게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고 말했다.(daily.redbullmusicacademy.com) 단속 나온 경찰도 세무당국도 그들을 어쩌지 못했다.

참가자 중에는 아마추어 음악 애호가도 있었고, DJ나 가수도 있었고, 음향 전문가도 있었다. 훗날 유명한 댄스클럽을 창업하고 빌보드 DJ 음악차트를 휩쓴 음악인들, 클럽 ‘시카고 웨어하우스(Warehouse)’의 창업자 로버트 윌리엄스, ‘갤러리’의 니키 시아노, ‘잔지바르’의 토니 험프리스, 전설적 DJ 래리 레반(Larry Levan)과 하우스 뮤직의 두 대부로 불리는 시카고의 프랭키 너클스(Frankie Knuckles), 뉴욕의 데니 크리비트(Danny Krivitt) 등등. 로프트 파티를 뉴욕의 ‘음악 중심(Musical Center)’이자 ‘디스코DJ들의 메카’라 했던 크리비트의 찬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휴머니티의 베스트 버전”

성ㆍ인종ㆍ계층에 상관없이

초대받으면 누구나 무료 입장

폭력ㆍ간섭 없는 해방구 실현

그의 공간은 고아원의 파티장처럼 자유로웠다. 사회가 기 죽이던 이들, 특히 LGBTQ의 성 소수자들이 경찰이나 타인의 간섭ㆍ폭력으로부터 벗어나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드문 공간이기도 했다.(guardian.com, 2016.11.15) 그는 “인간적으로 행동하는 한 당신은 우리 파티에서 뭐든 즐길 수 있다. 우린 싸울 필요가 없고, 다른 곳에서 문제가 될 만한 것들도 여기선 자유롭다.(…) 참가자들이 곧 후원자였다. 나는 무엇도 통제하지 않았고, 집단이, 분위기가 모든 걸 통제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락 팝 펑크 재즈 소울 라틴음악 할 것 없이 “댄스 플로어를 가득 채울 수만 있으면 뭐든” 틀었다. 음악 전문지 ‘롤링스톤’의 오랜 필자이자 비평가 빈스 알레티(Vince Aletti)는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을, 내가 한 번도 듣지 못한 순서로 쉴새 없이 들으며 무척 경이로운 경험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로프트 파티에서 흘러나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노래도 적지 않았다. 마누 디방고(Manu Dibango)의 ‘Soul Makossa’,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의 사운드트랙에 든 랠프 맥도널드의 ‘Calypso Breakdown’등이 그런 곡들이었다.(NYT. 16.11.18)

70년대 음악시장은 라디오에 크게 좌우됐고, 음반사들은 데모 음반을 방송사로만 보냈다. 새로운 음악을 알려면 DJ들도 라디오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묻히는 음악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 관행에 반기를 든 게 맨쿠소였다. 그는 로프트 파티의 DJ들을 모아 75년 메이저 음반사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경력 등을 통해 검증된 DJ들에게는 데모음반을 제공하라는 것. 대신 DJ들은 음반에 대한 감상과 플로어 반응을 피드백 해주겠다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게 비영리 벤처 ‘뉴욕 레코드 풀(Record Pool)’이었다. 초대 회장은 맨쿠소였고, 사무실은 그의 집이자 ‘로프트 파티’장이었다. 그는 “우리가 원한 건 음악을 최대한 간편하게 공유하자는 거였다. 당시 DJ들은 말 그대로 음악이 좋아서 일주일 내내 하루 12시간씩 클럽에서, 대개는 급여 없이, 받아도 일당 20~50달러씩 받으며 일하던 이들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들은 레코드를 샀다”고 말했다.(Discomusic.com, 위 기사) 시작 당시 26명이던 레코드 풀 회원은 금세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78년 레코드 풀이 정착되는 것을 본 뒤 그는 손을 뗐다.

레코드 풀 시스템은 80년대 대형 상업 클럽들의 성장과 함께 점차 변질됐다. “나는 돈이나 영향력을 얻기 위해 레코드 풀을 시작하지 않았다. 내 원칙을 조금만 구부리면 돈 벌 길은 많았다.(…) 레코드 풀 관계자들이 음반사 사람들과 결탁하기 시작하면서(sleeping in bed with) 많은 게 달라졌고, 그 사실이 서글프다”고 그는 2003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인간답게 행동하는 한"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도 차별 받지 않으면서 모든 걸 함께 누릴수 있었다는 맨쿠소의 'The Loft' 파티. 그의 음악 세례를 받은 이들은 그의 로프트를 “Soulvation(Soul+Salvation)의 공간”이라 불렀고, 맨쿠소를 "휴머니티의 베스트 버전"이라 했다. houseoffrankie.com

맨쿠소가 고집스럽게 지킨 원칙이 또 하나 있었다. 음악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음향장비로 원곡을 섞고(Sound Mixing) 비트를 흔들고(Beat Matching), 피치를 바꾸는(Pitch-Shifting) 것을 싫어했다. 대신 원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최고의 장비로 즐기는 방식을 고집했다. “좋은 스피커로 곡을 들으면서 나는 거기 담긴 엄청난 뉘앙스들을 알게 됐다.(…) 나는 아티스트의 원래 의도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점차 DJ들의 기량과 개성을 좇는 시대로 급격히 바뀌어갔다. 사운드의 디지털 시스템화와 함께 음악을 자르고 붙이고 키우고 비틀면서 더 크고 자극적인, 새로운 음악을 경쟁적으로 추구했다. 레리 레반의 맨해튼 ‘파라다이스 거라지’, 프랭키 너클스(Frankie Knuckles)의 ‘웨어하우스 Warehouse’, 브로드웨이의 초대형 디스코테크 ‘Studio 54’가 모두 1977년 잇달아 개장했다. ‘The Pirate’s Dilemma(‘디지털 해적들의 상상력이 돈을 만든다’란 제목으로 번역됐다)’란 책을 쓴 매트 메이슨에 따르면 그들 모두가 맨쿠소의 제자이고 그 클럽들 모두가 ‘로프트 파티’에서 번식해 나온 공간이었지만, 이미 그들은 그와 달랐고, 로프트 파티와 Studio 54는 극과 극이었다.

맨쿠소는 대형 상업클럽을 싫어했다. 인내력을 테스트 받는 것 같더라는 말도 했다. 멤버십 카드가 있어야 입장할 수 있고, 금속탐지기를 지나가야 하고…, 춤도 못 출 만큼 북적거리는 플로어도, 과도한 볼륨도, 성형된 음악도, 비싼 술값도 그는 못마땅해했다. “그게 틀려먹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싫다고 말하는 거다. 나는 경제적 장벽 없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원한다. 하루 종일 굶고 주머니에 동전 몇 개만 있어도 함께 가져온 음식과 술을 나눠 먹고 마시며 친구가 될 수 있는 환경,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조금도 다르지 않게 대접받는 환경.”

74년 맨해튼 소호로 이사했던 맨쿠소는 그 무렵 치솟는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85년 뉴욕 3번가‘알파벳 시티’로 불리던 변두리 우범지역으로 집을 옮겨야 했다. 파티 참석자들이 절반 미만으로 줄었지만 그는 같은 형식의 파티를, 변호사에게 사기를 당해 집을 날린 뒤로는 알파벳 따라 A거리 B거리, C거리로 거처를 옮겨 다니며, 96년까지 지속했다. 그는 “나는 (상업 클럽들로부터)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제안을 받곤 했지만, 그들에게 묶이고 싶지 않았다. 벤츠 대신 지하철을 타더라도, 내겐 절대 외면할 수 없는 25년도 더 된 친구들이 있었다. 로프트 파티의 아주 사적이고 친밀한 분위기, 그것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신 그의 명성은 해외로도 알려져 그는 96년 무렵부터 런던과 도쿄 등지에 초대받아 원정 로프트 파티를 열곤 했다. 99년과 2000년 영국 뉴포닉(Nuphonic)사가 제작한 그의 컴필레이션 음반 ‘The Loft’는 중고 시장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그의 로프트 파티는 1년에 4~6차례씩 임시로 빌린 공간에서 게릴라파티 형식으로 근년까지 진행됐다. 2013년 독일 잡지 ‘Placed’ 인터뷰에서 그는 “이제 참가자들 중에는 나이를 먹은 왕년의 멤버들도 있다. 당신은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데, 그건 (나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 음악의 성(castle)을 짓도록 도왔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친구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redbullmusicacademy, 위 기사)

영국의 저널리스트 팀 로렌스(Tim Lawrence)는 뉴욕의 모던 댄스음악 문화에 관한 자신의 책 제목을 맨쿠소의 파티 타이틀에서 따왔고(‘Love Saves the Day: A History of…’), 저널리스트 빌 브루스터(Bill Brewster)는 2010년 ‘The Record Players: D.J Revolutionaries’라는 책에 “밤의 역사(night life of history)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맨쿠소를 꼽았다. 그는 또 ‘Last Night a DJ Saved My Life’라는 책에 “만일 디스코의- 또 디스코에서 비롯된 모든 음악의- 천사가 있다면, 그건 데이비드 맨쿠소처럼 후줄근한 모습일 것이다. 물론 그 천사는 그의 클럽, 더 로프트에서 태어났을 것이다”라고 썼다. 뉴욕의 유명 댄스그룹 허큘러스와 러브 어페어스는 수많은 로프트 파티의 참석자들을 대표해 이렇게 그의 삶을 기렸다. “맨쿠소는 음악을 통해 인클루시브티(Inclusivity, 젠더와 성, 인종, 계급, 장애에 근거한 차별 반대 원칙)의 정신을 이 세상에 전하고자 그의 로프트를 제공했다. 그것은 휴머니티의 베스트 버전이었다.”(rollingstone.com, 16.11.15)

“휴머니티의 베스트 버전” 데이비드 맨쿠소가 11월 14일 별세했다. 향년 72세. 그는 독신으로 살았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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