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밝힌 '촛불민심'의 키워드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에 참여했던 주부 김혜란씨는 30년 전 끝내지 못한 민주화의 ‘마무리’를 하려 10일 오후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촛불을 들었다. 김씨 뒤에 세워진 경찰버스 창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구속을 촉구하는 풍자 포스터가 붙어 있다. 정반석 기자.

촛불에는 정해진 답이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 해야 하는지 ‘탄핵’돼야 하는지, 매주 몇 명의 시민이 모여야 하는지, 어떤 기준도 주어지지 않은 미지의 길이었다. 오직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촛불은 언제나 국민의 선택을 받아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10일 7차 촛불집회에서 만난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이뤄낸 흥분을 뒤로하고 각자의 언어로 촛불을 정의했다.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은 대한민국의 막막한 현실을 뻥 뚫어준 ‘드릴’이었고 모든 이의 마음을 잔잔하게 휩쓸고 간 ‘파도’였다. ‘국민의 힘’ 역시 촛불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떤 단어로 빈칸을 채웠든 2016년 촛불민주주의를 통해 국민 모두가 한 단계 성장한 건 분명하다.

743만 주권이 보여준 촛불은 ‘힘’이다

“탄핵축하합니다~” 루돌프 뿔 모양의 머리띠를 쓰고 ‘탄핵축하가’를 부르던 고교 3학년 유석영(18)양은 촛불을 ‘확성기’라 했다. 박 대통령 퇴진을 원하는 작은 목소리를 모이게 하고 또 수백만 배로 확대시킨 구심점이었다는 설명이다. 지난달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처음으로 거리정치에 참여했다는 유양은 “홀로 청와대 앞에 섰다면 두렵고 외로웠겠지만 같은 마음으로 촛불을 드는 동료가 도처에 있어 즐겁게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양처럼 시민들은 촛불집회를 통해 ‘평화적 다수’의 힘을 체감했다. 김점선(60ㆍ여)씨는 지난 10월 1차 촛불집회에 참가했을 당시 이 불빛이 정말 탄핵안 가결까지 이어질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일곱 차례, 743만명의 끈질긴 저항은 기어코 시민의 승리를 일궜다. 힘이 모이면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것도 촛불의 소중한 성과이다. 화가 진효선(31ㆍ여)씨는 지난달 5일 2차 촛불집회에서 행진을 하면서 확실한 용기를 갖게 됐다. 행렬을 이끄는 방송차는 없었지만 누군가가 구호를 선창하자 질서정연하게 뒤따르는 시민들은 든든함 그 자체였다. 진씨는 “평소에는 정치에 무관심해 보여도 결정적 순간에 하나로 뭉치는 모습을 보니 어떤 위기가 닥쳐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 혐오 극복한 촛불은 ‘참여’다

정치라면 무작정 손부터 내저었던 시민들은 촛불집회를 거치며 무력증을 극복했다. 정치를 ‘그들만의 리그’로 여기며 철옹성으로 생각했던 이들이 참여의 중요성을 체험한 것이다. 주부 이윤선(31ㆍ여)씨는 그 동안 국회를 다른 세상으로 바라봤다. 정치인들은 민생을 챙기기보다 계파 싸움에 열중하고 신중하게 투표해도 팍팍한 삶은 나아질 조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촛불은 부정부패를 키우는 주범은 무관심이라는 점을 일깨워 줬다. 이씨는 “예전처럼 ‘나 하나쯤이야’ 라는 생각으로 방구석에만 있었다면 탄핵안 가결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학생 김재현(25)씨도 이제 ‘정치’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을 싹 지웠다. 김씨는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본능적으로 정치를 싫어하는 성향이 있다”며 “하지만 촛불 아래 하나된 시민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고, 광장에 모이는 모든 행위가 정치였음을 배웠다”고 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과 담 쌓고 맛집만 골라 다녔다며 멋쩍게 웃은 배춘환(40ㆍ여)씨도 참여를 이어갈 생각이다. 배씨는 “설명해 준 가족도 없었는데 손팻말을 들고 광장에 나가자는 네 살짜리 막내아들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며 “나중에 정부의 잘못에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라도 어머니로서 솔선수범할 것”이라고 말했다.

촛불은 너와 나를 이어준 ‘연대’다

촛불집회에서 생면부지의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하나의 염원 아래 서로 손을 잡았다. 보수와 진보로 이념성향이 다르고, 농민 노동자 장애인 등 처지가 달라도 손에 든 촛불은 똑같이 밝게 빛났다. 대학생 박세훈(23)씨는 촛불집회가 소외된 이들을 위한 보상의 무대였다고 회고했다. 이전까지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노동자들이 “우리의 고통을 알아 달라”고 소리쳐도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였지만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모여 그들의 사연에 몸을 낮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씨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연대하면서 적대감과 편견이 다소 누그러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감은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기회’가 됐다. 장애인인권운동가 유두선(28)씨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이 바뀌기를 바라며 우리 역시 국정농단에 똑같이 분노하고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끝까지 촛불을 들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강원 철원군에서 온 농민 김용빈(52)씨는 촛불집회를 ‘민중의 통로’라고 불렀다. 이번처럼 농민들이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쌀값 인상’ 문제에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간은 드물었다. 김씨는 “썩은 정부를 갈아엎겠다는 마음으로 서울로 올라왔는데 시민들과 희망의 씨앗도 함께 뿌린 것 같다”고 미소를 지었다.

30년 묵은 빚 갚은 촛불은 ‘결별’이다

스무 살인 둘째 딸과 나이가 같았던 1987년, 주부 김혜란(50ㆍ여)씨도 6월 민주화항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30년 만에 다시 반정부 구호를 외친 김씨는 당시 미처 끄지 못한 불씨가 산불로 번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으로 광장을 찾았다. 김씨는 “독재정부의 유산을 깨끗이 청소하지 못한 탓에 한창 청춘인 두 딸이 대신 고생을 하고 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에게 2016년 촛불집회는 30년간 미뤄온 ‘마무리’였다.

이호준(47)씨도 마찬가지다. 87년 고교 3학년이었던 그는 광장을 생생히 기억한다. 모의고사 문제집을 사러 광화문 인근을 걷던 중 어디선가 최루탄이 날아왔고 수많은 시민은 혼비백산해 뿔뿔이 흩어졌다. 이씨는 “당시에는 어려서 민주화를 향한 여정이 얼마나 혹독하고 처절했는지 잘 몰랐다”며 “지금이라도 어른의 몫을 다하자는 부채 의식에서 촛불을 들었다”고 말했다.

사진동호회 회원 이경자(62ㆍ여)씨는 ‘참회’의 심정으로 광장에 나와 촛불집회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4년 전 박 대통령에게 투표했다. 하지만 고구마 줄기처럼 끊이지 않은 국정농단의 실체를 보고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초등학생 어린이도 뭔가 나라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찬 바람을 맞고 있는데 할머니 세대인 내가 뒤늦게 진실을 깨달았다는 게 부끄러울 따름”이라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촛불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시작’이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에서 새싹이 피는 것처럼 시민들은 촛불집회 이후 새로운 민주주의를 꿈꾼다. 탄핵이라는 디딤돌을 밟고 일어서 국민이 주인 되는, 민의가 반영되는 순도 높은 민주주의를 만들고 싶어했다. 회사원 황성현(39)씨는 탄핵안 가결 소식을 접하고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국민이 합심해 6차례나 대규모 집회를 열어야 정치권이 움찔하는 것을 보고 고민이 깊어졌다. 이씨는 “국민의 생각이 정치인에게 전달되면 그 여론이 정책과 정치로 구현되는 시스템이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인데 특정 정파와 보스를 위해 일하는 의원들에게 적잖이 실망했다”며 “촛불집회의 성과인 ‘광장의 정치’가 여의도에 이식될 수 있도록 정치체제의 틀을 새로 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광동(35)씨 역시 “수백만명이 거리로 나와야 국회의원 200명이 움직이는 현실은 확실히 비정상적”이라고 꼬집었다.

고교생 임채경(18)군은 촛불이 민주주의의 ‘줄기’가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줄기가 없으면 꽃망울이 터질 수 없는 것처럼 촛불집회는 선진 민주주의를 태동하기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란 믿음에서다. 임군은 “촛불이 횃불을 이루고, 다시 거름이 되어 국민 모두의 의견이 고루 반영된 튼튼한 민주주의 꽃이 피어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1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 고래’ 풍선 앞에서 이광동(왼쪽)씨가 부인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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