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그웬 아이펄

-가난한 이민가정 출신
아버지는 진보적인 종교인
“정치는 우리집의 제2신앙”
어릴때부터 언론인을 꿈꿔
-이중의 유리천장 깨다
부통령 후보 토론회 진행
전국방송 뉴스 메인 앵커 발탁
모두 “흑인 여성 최초” 붙어
-언론인의 본분에 충실
소수자ㆍ약자 목소리 대변하되
그들에게 빙의되는 것을 경계
선동 아니라 토론의 장을 확장
1977년 지역신문 '보스턴헤럴드어메리칸' 인턴기자로 일을 시작한 22살의 그웬 아이펄은 자신을 'Lonely-Only'라 부르곤 했다. 그는 그 곳의 유일한 흑인 여성 기자였다. 2013년 미국 방송사상 최초로 전국방송 메인 뉴스 앵커가 되기까지 그는 대체로 'Lonely- Only'였다.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그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대변했고, 그것이 저널리스트의 의무라 여겼다. 2012년 8월의 그. wikipedia.org

2008년 10월 미국 워싱턴대학서 열린 대선 후보 버락 오바마와 존 매케인의 러닝메이트 조 바이든(Joe Biden)과 사라 페일린(Sarah Palin)의 공개 토론. 미국 공영방송 PBS의 흑인 여성 앵커 그웬 아이펄(Gwen Ifill)이 진행자로 선정되자 공화당이 반발했다. 아이펄이 버락 오바마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게 시빗거리였다. 아이펄은 흑인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이어져 온 흑인 정치인들- 매사추세츠 주지사 드발 패트릭, 뉴저지 주 뉴워크 시장 코리 부커 등- 의 분투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글을 썼다. 그 책은 이듬해 랜덤하우스에서 출간될 예정이었고, 오바마가 당선되면 책도 더 주목 받을 상황이었다. 공화당으로선 반발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펄은 당당했다. 그는 그 시비 자체를 자신의 삶과 저널리스트로서의 명예에 대한 모욕이라고 맞섰다. “나는 지난 30년간 주로 정치 뉴스를 다루며 이력을 쌓아온 언론인이다. 내 평판이 일부 블로거의 한두 마디 시비에 흔들릴 리 없다.(…) 내가 어떻게 하는지 직접 방송을 보고 판단하라.”(AP, 2008.10.1) “백인 후보를 백인 기자가 담당한다고 시비 건 적 있었나.”(Time, 08.10.2) 대선 정국의 핫이슈로 떠오른 ‘논란’을 잠재운 주역은 다름아닌 공화당 대선후보 존 매케인이었다. 그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아이펄은 존경 받아온 직업 저널리스트다. 나는 그가 중립적인 진행을 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후보 못지않게 아이펄의 진행 자체가 유권자들의 큰 관심사였다. 뜻밖의 주인공이 된 그는 누구도 트집잡지 못할 만큼 공정하고 매끄럽게 토론을 진행했다. 그의 책 ‘The Breakthrough: Politics and Race in the Age of Obama’는 2009년 1월 오바마 취임일에 맞춰 출간됐고,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웬 아이펄은 늘 “흑인 여성 최초” 그웬 아이펄이었다. 이민자의 딸로 차별 속에서 성장하고 차별 속에서 저널리스트가 된 그는, 흑인 여성 최초로 부통령 후보 토론을 진행했고, 전국 방송 뉴스프로그램 공동 메인 앵커가 됐다. 그는 소수자들의 롤모델로 존경 받았고, 그 역시 그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대변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건 그가 흑인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저널리스트이기 때문이었다.

2007년 4월 CBS 라디오 시사토크쇼 ‘아이머스 인 더 모닝 Imus in the Morning’의 진행자 돈 아이머스(Don Imus)가 방송 중 노골적인 인종ㆍ성 차별 발언을 했다. 전미 대학 여자농구 결승에 진출한 럿거스대 흑인선수들을 두고 “곱슬머리 창녀들 nappy headed hoes”같다고 “농담”한 거였다. 미 전역 61개 방송사로 송출되는 인기 프로였고, 아이머스는 독설과 위트로 유명한 스타 진행자였다. 청취자 항의가 쇄도했다. 아이머스는 사과도 하고 해명도 하고 “흑인 랩에도 그 정도 가사는 예사 아니냐”고 항변도 했다. 그를 옹호하는 이들도 물론 있었다. 그 무렵 아이펄은 ‘Trash Radio Talk’란 제목의 칼럼에서 아이머스가 93년 백악관 담당기자로 일하던 자신을 두고 “NYT 대단하지 않아? 청소부에게 백악관을 맡기다니”라고 ‘농담’한 사실을 전해 들었다며 이렇게 썼다. “난 경악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성인이고 무엇보다 내겐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이 있어서였다. 그의 말은 나를 다치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럿거스대 스칼렛 나이츠(농구팀 이름)는 다르다. 생애 최대의 경기를 앞두고 있던 그들은 최악의 실망을 맛봤다. 그들은 아직 어리고, 여성 특히 흑인 여성들이 일상적인 모욕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껍질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이들이었다.” NBC 시사토론 프로그램 ‘Meet the Press’에 출연한 아이펄은 아이머스가 자신에 대해 한 말을 사과하려다가 나중에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발뺌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기 발언을 사과하려던 게 아니라 그 사실을 들킨 걸 사과하려던 거였다(apologizing for getting caught). 나는 우리가 그런 현실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이머스의 (럿거스대) 발언이 부적절했다고 지적할 법한 이들조차, 알면서 침묵해왔다”며 함께 방송에 출연한 동료 백인 언론인들을 성토했다. 아이머스에게 2주 출연정지 징계를 내렸던 CBS는 연 1,500만 달러를 벌어들이던 그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성ㆍ인종을 떠나 저널리스트라면 마땅히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대변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웬 아이펄이 11월 14일 자궁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1세.

그는 1955년 9월 29일, 카리브해 국가 파나마와 바베이도스 이민자 부모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흑인감리성공회(AME) 목사였다. 가족은 아버지의 교구가 바뀔 때마다 펜실베이니아, 매사추세츠 등지로 이사를 다녔고, 목사관이 없을 땐 공공임대주택에 살아야 했다. 훗날 그는 지역 신문 주택담당 기자로 일하던 20, 30대 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곧 그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방송인으로 유명해진 그는 “내가 일주일 동안 버는 돈이 어린 시절 내 아버지가 1년 동안 번 돈보다 많다”고도 했다. 그가 경제적 빈곤층의 문제를 두고 정치인들을 유난히 압박했던 건 가난했던 시절의 자신과 이웃들의 고통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비평가 크리스 웨이건트(Chris Weigant)는 블로그에 썼다.( huffingtonpost.com, 2016.11.14)

아버지는 진보적 종교인이었고, 저녁이면 온 가족이 TV앞에 모여 60년대의 뜨거운 거리의 뉴스들을 보곤 했다고, “정치는 우리 집의 ‘제2의 신앙’같은 거였다”고 그는 2009년 오프라 매거진 ‘O’ 인터뷰에서 말했다.(oprah.com) “이민자로서 어린 6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시위 등에 휘말려) 추방당하지나 않을까 속을 끓이곤 했다.”아이펄은 그 무렵부터 저널리스트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매사추세츠 보스턴의 여자대학 시먼스(Simmons) 칼리지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그는 지역신문 ‘보스턴헤럴드어메리칸’의 인턴으로 일했다. 어느 날 누가 그의 책상 위에 ‘검둥이 꺼져 Nigger go home’라는 쪽지를 써 둔 일, 그 쪽지를 편집장에게 보여주며 항의한 일. 그는 편집장의 제안으로 77년 그 신문사 기자가 됐고, 81년 ‘볼티모어이브닝선’으로 옮겨 84년까지 음식 주택 교육 담당 기자로 일했다. 그 무렵 인종차별 극복 대안으로 시행된 ‘강제통학버스’ 정책을 취재하다 정치와 행정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는 84~91년 워싱턴포스트 정치부 기자로 주지사 선거 등을 취재했고, 방송 패널로도 꽤 이름을 날렸다. 여러 주제의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그를 섭외하고자 했지만, 방송 출연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지만, 기자로서 진지한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방송에만 출연했다고 그는 말했다.(WP, 11.14) 91년 NYT로 옮긴 그는 이듬해 대선에서 빌 클린턴 후보를 담당했고, 클린턴이 당선되면서 백악관 출입기자가 됐다. 그리고 94년 NBC에 스카우트돼 방송기자로서 연방의회를 취재했다. 신문사에서 17년을 일한 그가 방송기자로 변신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취재 첫날 카메라기자 없이 혼자 나갔다가 곤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방송저널리스트로서도 그는 돋보였다. 99년 미국 최장수 전국 뉴스토크쇼 ‘Washington Week’ 진행자가 됐고, 2004년과 2008년 부통령 TV토론회를 진행했다. 2013년 주디 우드러프(Judy Woodruff)와 함께 PBS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 ‘News Hour’의 여성 공동앵커로 발탁된 것도 흑인 여성으로선 미국 방송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13년 8월 PBS가 메인뉴스 프로그램 'NewsHour'의 공동앵커로 그웬 아이펄과 주디 우드러프를 선정한 것은 그 자체로 큰 뉴스였다. 아이다호 공영TV도 그들을 인터뷰했다. idahoptv.org

ABC NBC CBS 등 거대 민영방송에 밀려 고전해온 공영 PBS가 2013년 메인 뉴스 진행자로 여성 투톱체제를 선택한 것은 모험이자 승부수였다. 1975년부터 전설적 앵커 짐 레러(Jim Lehrer, 1934~)와 로버트 맥네일(Robert MacNeil, 1931~)의 공동앵커 체제를 고수해온 PBS는 95년 맥네일에 이어 레러도 은퇴를 해야 할 시점에 이르자 2011년 후임자 물색을 시작했다. 후보는 아이펄과 우드러프 외에 3명(여성 한 명과 남성 두 명)이 더 있었다. PBS는 그들 다섯 명을 레러의 파트너로 1년여 간 교체 투입하며 평가했고, 그 피 말리는 경쟁 끝에 2013년 8월 둘을 선택했다. 앞서 백인 여성 저널리스트 케이티 커릭(Katie Couric, 1957~)이 2006~11년‘CBS 이브닝뉴스’를 단독으로 진행한 적은 있었지만, 여성 저널리스트, 특히 흑인에게 메인 뉴스를 맡긴 건 파격이었다. NYT 인터뷰에서 아이펄은 이렇게 말했다. “소녀시절 보던 뉴스 프로그램 진행자 자리에 나처럼 생긴 사람은 없었다. 여자도 없었고, 유색인종도 없었다.(…) 지금 어린 소녀들이 주디와 내가 진행할 방송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무겁게 생각한다. 그들에겐 우리 모습이 완벽하게 평범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일 자체가 대단한 진전(big breakthrough)으로 여겨지지 않게 될 것이다.”(NYT, 2013.8.6) 그는 저 단어(breakthrough)를 의도적으로 쓰면서 2009년 자신의 책 제목과 미국의 정치, 그리고 차별 없는 미래를 함께 떠올렸을지 모른다.

아이펄은 2004년 대선 부통령 후보 토론을 진행하며 25~44세 미국 흑인 여성의 AIDS 사망률이 백인 여성보다 13배나 높은 사실을 제시하며 딕 체니와 존 에드워즈에게 각자의 생각을 물어 전국 시청자 앞에서 두 후보를 궁지에 몬 적도 있었다.

소수자ㆍ약자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것과 그들에게 빙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아이펄의 신념이었지만, 후자는 그가 가장 경계한 바였다. 그는 가려진 사안에 빛을 비춰 세상에 알리되 사회적 공분에 불을 짚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의로움을 과시하지 않기 위해, 야비한 현실 앞에서도 지사나 선동가가 아닌 저널리스트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럼으로써 저널리스트로서의 본분과 기품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자신과 싸웠다. 2014년 아메리칸대 공공문제대학원 학위수여식 연설에서 아이펄은 “내가 저널리즘에 끌린 것은 나의 의견을 타인에게 강요하기보다 토론의 장을 확장하는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였다”며 “누구의 이야기를 전할 것인가,(…) 누구의 사연과 목소리가 무시당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저널리스트가 지녀야 할 수정헌법 1조의 책임”이라고 말했다.(npr.org, 11.14)

야심과 책임감, 특히 자신을 지켜볼 어린 소녀들을 위해서라도 그는 뉴스 앵커로 오래 잘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자궁내막암 발병 사실을 감춘 채 투병 중에도 방송을 지속했고, 지난 6월 인디애나 주 엘하르트(Elkhart)에서 열린 버락 오바마 대통령 타운미팅 행사 진행을 맡기도 했다. NYT 전 에디터인 친구 리처드 버크는 WP 인터뷰에서 “아이펄은 강도 높은 식이요법과 병행해 목요일에 약물치료를 받고 금요일에 ‘워싱턴 위크’를 진행하고, 주말에 집에 쓰러져 있다가 월요일 다시 출근하곤 했다”고 말했다.(WP, 위 기사) 하지만 올 초 그는 약 한 달간 방송을 중단해야 했고, 11월 초부터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지난 대선 뉴스를 진행하지 못했다.

그웬 아이펄은 2008년 피바디상을 비롯, 인권ㆍ언론 단체들이 주는 수많은 상을 탔고 20여 개 대학의 명예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매번 값진 연설로 상에 보답했다. ‘NewsHour’책임프로듀서 사라 저스트는 “아이펄은 수많은 젊은 언론인들의 멘토였고, 저널리스트들의 저널리스트였다”고 애도했다. 오바마는 “그는 늘 인정사정 없는 질문으로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스스로 저널리스트로서의 책임을 다했다”며 “취재 현장과 행사장, 토론과 앵커 데스크 등 어디서든 그는 오늘의 시민들뿐 아니라 내일의 저널리스트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고 말했다.

11월 19일 장례식에는 미셸 오바마를 비롯 수많은 정ㆍ관계와 언론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아이펄의 사촌인 미국 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 법률팀장 셰를린(Sherrilyn)을 비롯, 파나마와 바베이도스 출신 이민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첫 법무장관을 지낸 바베이도스 이민자 출신 에릭 홀더(Eric Holder)도 거기 있었다. 홀더는 아이펄의 까다로운 질문에 자기도 곤욕을 치른 적 있다며, 기자들에게 “겁 먹고 움츠리지 말라”고, 힘 있는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진실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고 주문했다.(huffingtonpost.com, 11.20) 허핑턴포스트는 그의 장례식을 ‘회복의 모임(Revival Meeting)’이라 썼다. 트럼프 당선으로 충격 받고 절망한 그들이 그웬 아이펄의 삶을 회고하며 위안과 희망을 얻었으리라는 의미였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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