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드코리아스페셜 우승한 아마추어 사이클 최강자 인터뷰

자전거 위 이형모(37)씨는 누구보다 빠르고 강하지만 자전거에서 내려오면 돼지 저금통을 든 ‘착한 남자’가 된다.

이번에도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는 그의 몫이었다. 우승이 확정되자 두 손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이형모(37)씨의 국내 아마추어 최고 권위 대회 ‘트루 드 코리아 스페셜’ 종합우승이자 72번째 1등의 순간이었다.

그는 2009년 페달을 밟기 시작한 이후 꾸준히 대회에 참가해 올해 11월까지 77회 우승을 차지했다. 자전거 입문 초기 철인대회를 포함하면 우승횟수는 훨씬 늘어난다. 대회가 많은 시기엔 토요일 대회에서 우승하며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일요일 대회에 출전해 1위하며 주말을 마무리하는 일이 흔할 정도다.

이형모(가운데)씨가 지난 10월 17일 국내 아마추어 최고 권위 자전거 대회인 '트루 드 코리아 스페셜'에서 종합우승을 확정 지은 뒤 입상자들과 우승패를 들어 보이고 있다. 트루 드 코리아 스페셜 홈페이지

대회 출전하는 족족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아마추어 사이클 최강자 = 이형모’라는 명제를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 앞에 ‘빠르다’, ‘강하다’라는 수식어보다는 ‘순수’, ‘순박’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안장 위에선 앞만 보며 쉴새 없이 전진하지만 안장을 내려오면 나보다 주변을 더 먼저 돌보는 ‘착한 사람’이 된다.

안장 위 이형모는 빠르고 강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특기는 산 타기, 취미는 달리기’ 강원도 촌놈

그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30살이던 2009년부터다. 산악인의 꿈을 접으면서 자전거에 올랐다.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산에서 뛰어 놀았다. 원주 치악산을 한 달에 두 번 이상 오를 정도로 산을 좋아했다. 고등학생 땐 산을 잘 타고 싶어 몸에 10kg짜리 납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도 했다. 덕분에 체력장에서 오래 달리기는 항상 1등이었다. 그는 “납주머니를 차고 다니니 다들 이상하게 여겼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저 조용히 지냈다”며 학창시절을 기억한다.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못할 것 같았다”는 그는 납주머니 차고 산을 오르며 다져진 체력을 믿고 체육학과로 진학했다.

타지에서의 체육과 대학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이유 없는 폭행과 얼차려가 이어졌다. 폭력이 일상화된 곳이었다. 억지로 남 비위 맞추는 일에는 젬병이었다. 새내기 동아리 활동을 금지한 학과 선배들 몰래 산악부에 들어갔다. 산은 그나마 익숙했다. 유일한 해방구였다. 방학 땐 대부분 산에서 지냈다. 납주머니를 몸에 두르고 배낭에도 넣었다. 더 힘든 것이 더 멋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강요 받지 않고 그저 좋아하는 것만 좇았다”고 “자유로웠지만 꿈은 막연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특전사 입대였다. “힘든 군생활을 겪으면 막연하기만 한 미래가 뚜렷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며 “자유보단 의무가 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4년 3개월 군생활에서 배운 것은 의무 대신 ‘자유의 소중함’이었다. 전역 후 학교로 돌아와 가고 싶은 산을 마음대로 오르며 쾌감을 느꼈다.

2009년 에버레스트 등정하고 있는 이형모씨. 이형모 블로그

그렇게 계속 산을 타며 해외원정 등반까지 참여했다. 전문 산악인의 길로 들어서는가 싶었다. 카자흐스탄 칸텡그리, 중국 쉐바오닝, 네팔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12차례 해외 원정을 다녀왔다. 원정에서 스승을 잃고, 동료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나를 걱정해 주는 주변 사람 보는 것이 힘들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처음으로 포기했다”는 그는 2009년 더 이상 산에 오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소방공무원이 되기로 마음 먹고 노량진으로 갔다. 주변 기대에 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전거로 대륙을 횡단하다

노량진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틈틈이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넘치는 에너지를발산한 곳이 필요했다. 어렸을 때부터 다졌던 체력에 세계 최고봉에서의 극한 경험은 자전거와 함께 진가가 발휘됐다. 자전거에 입문한 지 3개월 만에 철인 3종 경기에 나가 입상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엔 서울시청 트라이애슬론팀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전문선수의 꿈을 키웠다. 자전거 실력이 다른 선수보다 뛰어났으니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1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부족한 수영 실력을 채우긴 역부족이었다. 다시 노량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와 함께 하는 삶은 계속된다.

엘리트 선수의 꿈은 포기했지만 자전거는 계속 탔다. 각종 대회에도 계속 출전했다. 그러다 지인에게 미국대륙횡단자전거대회(Race Across America) 2인 부문에 함께 참여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미국대륙횡단자전거대회는 정해진 시간 안에 5,000km에 달하는 거리, 5만m에 이르는 상승고도 코스를 정해진 시간 안에 완주하는 대회다. 참가자를 극한으로 내모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형모씨는 흔쾌히 수락했다.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며 대회 준비를 병행했다. 대회를 2개월여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했다. 왼쪽 종아리뼈, 척추 날개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한 달이면 회복될 줄 알았지만 퇴원까지 50일이 넘게 걸렸다. 대회 10일을 앞두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미친 짓이었다. 주변에선 포기를 권유했다.

“퇴원 첫날 자전거로 과속방지턱을 넘는데 심한 통증이 와서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대회에 안 가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며 “예상치 못한 힘든 상황을 겪으니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 기억했다. 좋아하는 것을 좇아 앞만 보고 달리던 그가 주변을 넓게 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열흘 남짓 짧은 시간이었지만 대회 출전에 앞서 도전을 여기저기 알리며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은 기부금은 아동복지시설, 이주노동자, 탈북민을 돕는데 쓰기로 했다.

이씨의 부상은 완쾌되지 않았고 대회기간에 동료가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완주에 성공했다.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더 기쁘더라.” 더 이상 그에게 개인적인 성취는 삶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2014년 미국대륙횡단대회 개인부문에서 완주한 이형모씨가 환호하고 있다. 이형모 블로그 '철인 27호 땡모'
‘기부 라이더’의 삶

미국대륙횡단대회를 무사히 마친 뒤 소방관 준비를 멈추고 자전거 유통 업체인 알피엠스포츠에 입사했다. 좋아하는 취미가 먹고 사는 일이 되는 데 고민도 많았지만 ‘천천히 주변을 돌보며 가자’는 그의 신념에 자전거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땡모가 간다’는 강연 행사를 만들어 전국 각지를 돌며 미국대륙횡단대회 때 경험을 공유했고 자전거를 바르게 타는 방법을 알리기 시작했다.

지난 9월 10일 이형모(맨 오른쪽)씨가 '기부 라이딩' 행렬을 이끌고 있다. 2011년부터 매년 진행하고 있는 행사는 자전거로 서울-구미-강릉 500km 구간을 달리며 후원업체와 참가자로부터 모은 기부금을 복지 기관에 전달한다.

2011년부터 매년 서울에서 구미를 거쳐 강릉에 이르는 500km 구간을 달리는 ‘기부 라이딩’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 각종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해 거둔 상금의 일부도 꾸준히 기부하고 있다. 2014년에는 미국대륙횡단대회 1인 부문에 참가해 완주하며 약 3,00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가 자전거 활동을 통해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은 8,000만원이 넘는다.

“주변을 챙기고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전거를 더 열심히 타게 된다. 안장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은 의미를 쌓는 시간이 되는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빨리 달리는 데만 의미를 두니 주변은 물론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또 “자전거만큼 정직한 운동은 없다.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자신을 둘러 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면 실력은 자연스럽게 는다”며 “안장 위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늘도 안장 위에서…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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