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소다]<15> ‘페미존’과 두 개의 전선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여성, 성소수자 단체들의 집회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에 등장한 문구들.

“미스 박, 미스 박은 우리 대통령이 아니에요” “머리끄댕이를 잡고 데리고 내려오고 싶네요” (사전집회 발언 중)

“사전집회에서 나왔던 ‘미스 박’발언에 대해 항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평화와 평등이 중요한 집회입니다. 나이, 성별, 지방과 상관없이 평등하게 차별이나 혐오감 없이 함께합시다” (제 4차 촛불집회 사회자 박진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공동상황실장)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100만명이 참가한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비선실세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제 4차 촛불집회는 특이한 발언들이 잇따라 쏟아졌다. 여성 혐오 발언을 자제하자는 주장들과 행동들이 나오면서 성평등 차원에서도 진일보한 시위 문화를 보여줬다.

이전 촛불집회에서는 현 정권에 분노한 수많은 연사들이 정권 규탄 발언을 했다. 더러 대통령과 비선실세를 겨냥한 원색적인 욕설부터 여성혐오 발언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지만 국민적 분노에 편승해 그냥 지나쳤다.

지난 5일 제 2차 집회에서 민중총궐기투쟁본부의 사회자가 박 대통령을 지칭한 여성비하 발언을 했고 12일 제 3차 집회에서 50대 남성은 20대 여성을 성추행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들 이후로 여성 혐오 발언에 대한 자제요구와 ‘여성이 안전하게 시위에 참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12일 촛불집회를 주최하는 민중총궐기 측이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린 사과문. 페이스북 캡쳐
‘여혐 발언 하지 않겠다’ 주최측 첫 사과

이후 시민들과 단체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지난 12일 민중총궐기측은 처음으로 사과문을 내고 “이번 일을 계기로 변화하겠습니다. 대회에서 성별, 연령 등 참여자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발언의 중요성을 인식해 평등한 집회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그 결과 이날 열린 제 3차 촛불집회의 모습이 달라졌다. 당장 서울 시청 인근 자유발언대에 오른 남성이 “망측한 일을 벌인 여자 대통령의 행각이 병신년(丙申年)에 발각됐다”는 발언을 하자 시민들 사이에서 “여성과 장애인들도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고 있다” “차별적인 말을 삼가해 달라” 등 부적절한 발언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 19일 열린 제 4차 촛불집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최 측이 여성혐오 발언 등을 제재하겠다고 공지했고 실제 관련 발언에 대해 지적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19일 열린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 집회에서 페미당당 활동가가 집회 관련 행동수칙을 공지하고 있다.
두 개의 전선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

이런 변화는 집회에 적극 참여한 페미니스트 단체들의 조직적인 행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라는 여성, 성소수자 단체 약 200여명의 단독 집회다. 이들이 거리에 나선 것은 혐오발언과 성추행 위협 없이 여성들이 안전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이하 박하여행), 페미당당, 강남역10번출구, 불꽃페미액션,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정의당 여성위원회, 노동당 여성위원회, 범야옹연대 등 10여개 단체는 지난 12일 제 3차 집회부터 이러한 문제의식을 논의한 끝에 단독 집회 공간인 ‘페미존’을 형성하고 19일에 첫 집회를 열었다. 이들의 전선은 두 개다. 한 쪽에서는 박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싸우고 다른 한 쪽에서는 집회에서 일어나는 성추행과 혐오발언으로 여성 및 소수자들이 배제되는 현상과 싸운다.

연단에 오른 발언자들은 그동안 각종 집회에서 발생한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규탄했다. 박하여행의 한 활동가는 “지난해 집회에 나온 한 발언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무슨 X’만 하고 내려갔다”며 “일부 여성들은 당황해서 빨리 내려보내라며 난리가 났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웃고 박수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보고 우리가 이러려고 시위를 하고 집회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나영 사무처장도 “남성들은 시위에 참가한 여자아이들을 보고 ‘구호를 외치는게 기특하다’거나 ‘공부나 더 하지, 왜 이런데 나왔어’라는 반응을 보였다”며 “그때 외쳤던 구호가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였다”고 말했다.

혐오발언ㆍ폭력 단속하는 ‘자경단’도 활동

혐오 발언 없고 안전한 집회를 만들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를 위해 페미당당 활동가는 집회에 앞서 ‘행동수칙’들을 공지했다. 혐오 발언과 이를 담은 플랜카드 문구를 보면 근처 행사 관계자들에게 알려주고, 관계자들이 이를 기록했다가 제작측에 항의하기로 했다. 또 혐오발언이 나오면 아예 구호 선창으로 바로 맞받아친다.

집회 참가자에게 폭언이나 폭력의 위협이 있으면 주변에 동영상 촬영을 요청하거나 ‘페미자경단’이라는 스티커를 붙인 행사 관계자에게 신고하라고 조언했다. 또 촛불집회 본 무대에서 혐오발언이 나오면 행사 관계자들이 전달받아 주최측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보내 바로 중단과 사과를 요구하기로 했다. 지난 19일 ‘미스 박’발언 사과도 이 같은 행동 수칙에 따른 결과물이다.

본 집회 이후 이들은 “페미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 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퀴어가 당당해야 박근혜가 퇴진한다”등의 구호도 나왔다.

하지만 기존 남성 조직 위주의 집회 문화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는 단체들이 항상 호의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박하여행의 김수정 활동가는 “남성들이 불쾌한 시선을 던지거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대해 쑥덕거리는 말들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비하 표현이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이것 역시 똑같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차별적인 부분에 문제제기를 하는 페미존이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앞으로 이어지는 집회 중 발생하는 여성혐오, 성폭력 발언 사례를 모으는 작업도 하고 있다. 이런 발언들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향후 시위 문화 중 성 차별적 행동 철폐를 위한 연구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따라서 이들은 26일 열리는 제 5차 촛불집회에서도 ‘페미존’을 만들어 같은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글ㆍ사진=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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