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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오기(傲氣)의 정치 대처법

입력
2016.11.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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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ㆍ퇴진 끌어낼 현실적 방법 없어

국민적 놀림거리에 지킬 명예 있을까

탄핵 매듭까지 긴 호흡과 인내 필요

가장 큰 우려가 현실화했다. “하야도 퇴진도 없다”고 버티던 박근혜 대통령이 거꾸로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엘시티 비리 수사 지시와 외교부 2차관 임명 등으로 국정을 재개했다. 여당 친박계도 이정현 대표와 최경환 의원 등이 잇따라 ‘하야ㆍ퇴진’ 요구를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최순실 정국’ 최초의 조직적 반발이다. 나라가 어찌되든, 국정표류가 얼마나 더 길어지든 알 바 아니라는 식이다.

주말마다 100만명, 1,000만명이 광화문에 모여 소리 높이 ‘하야!’를 외쳐도, 야3당이 어떤 정국수습 방안에 합의해도, 당장은 박 대통령을 끌어내릴 현실적 방법이 없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려고 달려든 격이니, 도망갈 구멍을 제대로 보지 않고 쥐를 쫓았다는 뒤늦은 후회가 정치권의 가슴에 사무칠 만하다.

벌써 한 달 가까운 ‘최순실 사태’의 전개 과정을 돌이켜보면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정치적 이상(理想)이 현실정치 감각을, 도덕 감정이 계산적 이성을 가린 때문에 생긴 허점이다. 최씨의 국정개입에 대한 비난의 심정이 앞을 다투어 분출해 만든 ‘국정농단’이미지가 박 대통령의 실체를 가린 점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언론과 SNS를 채운 박 대통령의 모습은 ‘최씨가 조종하는 꼭두각시’나 ‘최씨에 영혼을 지배 받는 좀비’에 지나지 않았다. 풍자 만화나 개그 소재로서는 훌륭하지만, 진지한 분석의 근거일 수는 없었다. 그런 박 대통령의 이미지는 과거 상당수 정치 분석가들이 인정한 ‘YS와 DJ 이후 처음 보는 현장 흡인력’은 물론이고, 순식간의 일이어서 최씨조차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대전은요?” 장면과 완전 딴판이다. 어느 것이 실상이고, 어느 것이 허상일지는 불문가지다.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국회의원 배지를 단다는 말에 익숙한 정치권이라면 더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야권은 박 대통령을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국민과 자신들이 바라는 즉각적 하야나 조기 퇴진을 얻어낼 수 있으리란 판단에 기울었다. 비선 실세인 최씨와 수족처럼 부리던 청와대의 실세 머슴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는 바람에 ‘멘붕’상태리란 추측은 빗나갔다. 거꾸로 박 대통령은 마지못한 자신의 ‘책임총리 국회 추천’제안조차 일축한 야권에 대해 이를 갈았음에 틀림없다.

박 대통령의 명예 감정에 대한 오인이나 기대 또한 큰 구멍이었다. 흔히들 워터게이트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예를 떠올리며, 선진국 클럽의 일원인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예 감정에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창피스러움을 싫어하는 염치(廉恥)의 나라에서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온 국민의 놀림거리, 아니 세계적 조롱거리가 된 박 대통령에게 더는 잃을, 또는 지켜야 할 명예라고는 없었다. 실은 닉슨도 특별검사를 해임하는 등 2년을 버틴 끝에 사임했으니, 애초에 정치지도자의 명예 감정이란 믿을 만한 게 아니다.

진작에 이런 구멍과 박 대통령 본연의 모습에 눈을 떴다면, 즉각 퇴진은 아니더라도 사실상의 2선 후퇴나 권한이양을 이룰 기회는 있었다. 2일의 김병준 총리후보자 지명과 8일의 ‘책임총리 국회 추천’, 그리고 무산된 15일의 청와대 회담이다. 박 대통령이 먼저 책임총리에 맡길 권한을 밝히고 사전에 국회와 협의하는 절차를 밟지 않아, 권한이양의 분명한 범위를 밝히지 않아, 야당 내의 반발이 너무 커서 각각 폐기됐다. 그러나 헌법이 예정한 범위 안에서 박 대통령의 제안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했다면 적어도 그 상태로 박 대통령의 오기의 정치, 독기의 정치를 제약해 둘 수 있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탄핵 절차뿐이다. 애초에는 그조차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빚어질 국론분열과 혼란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버티기 자세가 분명해졌고, 불법도 불법으로는 단죄할 수 없는 법 현실에서는 불가피하다. 그래서 훨씬 더 긴 호흡과 어느 정도의 국정혼란은 참아 내고 말겠다는 국민적 각오가 필요하다.

주필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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