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 이 코너의 칼럼 ‘트럼프 현상과 포퓰리즘의 미래’에서 표심의 예측 불가능성을 고려할 때 미국 대선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고 썼다. 그 예측 불가능한 표심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당시 나는 트럼프 현상에 담긴 두 가지 포퓰리즘 경향을 주목했다. 첫째, 트럼프 현상은 포린폴리시 전 편집장 모이제스 나임이 강조한 ‘권력의 종말’을 상징한다. 정치사회의 무능력에 환멸을 느낀 국민과 직거래 소통을 추구하는 비(非)정치적 리더가 부상한 게 ‘트럼프식 포퓰리즘’의 정치다. 둘째, 트럼프 현상은 정보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이 이론화한 ‘정체성의 정치’의 증거다. 이 현상의 본질은 기성 국가 질서에 대한 보수적 시민사회의 반격에 있다. 반(反)이민 정서, 기득권 카르텔에 대한 반감, 백만장자 로빈 후드에 대한 기대감 등 ‘헬조선’에 비견할 ‘헬미국’에 대한 보수적 백인 계층의 불안과 욕망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게 트럼프식 포퓰리즘의 특징이다.

선거를 결정짓는 것은 인물ㆍ정책ㆍ전략ㆍ캠페인 등 다양하다. 개표를 지켜보면서 내가 주목한 것은 거시적 흐름과 구도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미국 대선의 흐름과 구도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아쉽게도 늘 ‘제3의 인물’이었다. 대선의 실질적 두 주인공은 트럼프와 민주당 후보 경선에 나선 버니 샌더스였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대선은 인물로 상징화된 정치 세력의 대결이다. 트럼프는 기득권층으로부터 소외된 보수적 유권자들의 박탈감을, 샌더스는 기득권층으로부터 배제된 진보적 유권자들의 분노를 대표했다. 민주당이 샌더스를 후보로 선택했다면 선거 결과가 달라졌을 가능성을 한 번쯤은 상상해 볼 만하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경제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현재의 경제를 특징짓는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과 통제 불가능성이다. 제로 성장에 가까운 시장, 리더십이 실종된 정부, 보수 대 진보로 양극화된 시민사회는 불확실성과 통제 불가능성의 다채로운 민낯들이다. 이 과정에서 어느 나라든 국민 다수는 경제위기가 가져온, 출구가 보이지 않는 불안과 공포를 느껴 왔다. 미국이라고 사회사상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주장한 이러한 ‘유동하는 공포’로부터 예외는 아니었다. 정치는 유동하는 공포로부터 국민을 구출해야 함에도 기성 정치사회는 그럴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러한 흐름과 구도 아래 워싱턴의 아웃사이더 트럼프는 유권자들을 ‘두 국민’으로 철저히 나누는 전략 및 캠페인을 구사했다. 기득권과 비(非)기득권을, 백인과 유색인종을, 남성과 여성을, 미국과 미국 아닌 세계를 분단했다. 그는 선거 막판까지도 ‘갈라치기’로 일관했다. 선거인단의 과반수만 확보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다수결 민주주의의 원리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셈이었다. 일찍이 영국 마거릿 대처가 추진했던 ‘두 국민 전략’을 벤치마킹함으로써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세계 최고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자, 이제 사실판단을 넘어 가치판단을 해보자. 트럼프 당선인은 당선 수락 연설에서 국민에겐 단합과 통합의 메시지를, 국제사회엔 공정과 파트너십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하지만 클린턴을 지지했던 미국인들과 유럽과 아시아의 우호국들은 곧 출범할 트럼프 정부의 정책에 대해 적잖은 우려를 표명한다. 당장 우리나라의 경우 북핵 위기, 주한 미군,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에서 트럼프 정부와 어떤 공조 내지 협상을 이룰 것인지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트럼프의 ‘미국 제일주의’가 전후 70년 ‘팍스 아메리카나’의 대외정책 기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법학자 에이미 추아는 자신의 저작 ‘제국의 미래’에서 미국이 지구적 헤게모니를 지속하기 위해선 ‘오만한 미국’이 아니라 ‘관용의 미국’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불확실성과 통제 불가능성의 세계사회에 대한 올바른 대처 방안은 어느 나라든 신뢰와 원칙이라는 국제적 ‘사회 자본’을 중시하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 바야흐로 미국은 ‘트럼프 시대’라는 역사적 기로에 다가서고 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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