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권력이양 거부하면 하야ㆍ탄핵뿐
대통령으로 헌법위반 책임 비켜갈 수 없어
야당은 정략적 접근 말고 절차 착수해야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박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안한 것은 임기를 절반이나 남겨둔 시점이었다. 재ㆍ보궐선거 참패 등으로 국정운영이 어려워지자 그는 남은 임기와 관계없이 권력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한나라당이 대연정을 주도하고 여야 합의로 거국총리를 세우면 대통령의 권력을 이양한다는 구상이다. 너무 파격적인 제안에 보수세력뿐 아니라 지지자들도 반대해 실현되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한국 정치의 현실을 앞서간 시도였다.

10년이 지나 대연정 방안이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제시한 게 아니라 정치권에서 분출됐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책임으로 야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권력 이양을 주장하고 있다. 그 최소한의 요구가 2선 후퇴, 거국중립내각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을 넘길 생각이 조금도 없다. 아직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고 있는 듯한 태도다.

지난주 말 박 대통령의 퇴진과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전국을 휩쓸었다. 수십만 명의 평범한 시민이 거리에 나온 모습이 1987년 민주화 운동을 재현한 듯하다. 전국 대학의 교수와 학생이 너나없이 시국선언을 하고 나선 것도 민주화 이후의 보기 드문 풍경이다. 그동안 밑바닥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양상이다. 국민이 더 이상 박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박 대통령이 권력을 계속 움켜쥐려는 상황에서 권한을 강제로 제한하려면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무너진 리더십을 다시 세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박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탄핵뿐이다.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켜 대통령 직무를 정지시킨 뒤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직무에 복귀시키거나 조기 대선을 치르는 방법이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야당은 탄핵을 입에 올리기를 극구 꺼려한다. 차기 대권이 눈앞에 보이는데 역풍을 맞지 않을까 하는 정략적 고려 때문이다. 거대한 민심의 흐름을 선도할 능력도, 국민의 뜻을 구체화할 복안도 없이 정권을 잡을 생각만 하니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그들 역시 ‘기득권 정치 세력’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탄핵소추안의 국회 통과와 헌재 인용에 현실적 장벽이 있을 수는 있다. 국회에서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한데 새누리당 의원 가운데 29명 이상이 동조할 것인가가 미지수다. 하지만 현 상황은 노무현 탄핵 때와는 180도 다르다. 당시는 주권자인 국민이 정략적 탄핵 발의에 준엄한 심판을 했지만 지금은 그 반대다. 박 대통령이 민심을 외면한다면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이 탄핵에 가세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보수적 색채가 짙은 헌재 통과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많지만 과거와 다른 결정을 내릴 여지가 충분하다. 노무현 탄핵 기각 결정 당시 헌재는 ‘대통령이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했지만 파면시킬 정도의 중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즉 ‘중대한 법 위반’에 해당되면 탄핵사유가 된다는 것인데, 다수의 헌법학자들은 박 대통령이 중대한 위법행위를 했다고 보고 있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과 공무상비밀누설죄, 제3자 뇌물수수죄 등 법률적 위반 행위가 뚜렷하다. 이런 법률적 책임보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인에게 양도해 대의민주주의의 골간을 허문 것은 훨씬 엄중한 헌법 위반 행위이다.

설혹 탄핵이 좌절되더라도 임기 중에 헌법을 유린한 지도자는 민주적 방식으로 축출할 수 있다는 경험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제왕적 권력구조가 민주적 권력구조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면 그 어떤 헌법ㆍ정치교과서보다 교훈적이다. 지금은 정치권이 전략적 득실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추락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되찾고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개조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국민의 분출하는 열망에 답해야 할 책임이 정치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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