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벤저민 페이턴

[가만한 당신] 벤저민 페이턴

벤저민 페이턴은 터스커기대 총장으로 28년간 재직하며 이름없던 흑인대학을 그럴싸한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켰다. 총장으로서 가난한 대학 살림까지 꾸려가면서, 아이비리그 학맥과 포드재단 인맥의 도움을 받기도 했겠지만, 학자의 양심과 교육가로서의 자존심은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미국 역사와 민주주의가 터스커기와 남부 흑인들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며 미국 대통령의 공개 사과를 받아냈고, 대학 위상과 더불어 흑인의 인권과 명예를 함께 드높였다. tuskegee.edu
40년 지속된 매독 실험

美정부, 감염자 등 흑인 600명

치료 않고 실험… 상당수 숨져

언론의 폭로에도 국가는 침묵

미국 앨라배마 주 터스커기(Tuskegee)는 주민 9,500명 남짓의 작고 가난한 마을이다. 2015년 6월 ‘월스트리트 24/7’은 앨라배마 주 평균 중간소득이 4만3,253달러(전국 평균은 5만3,046달러)로 미국 하위 5위이며, 그 안에서도 가장 가난한 마을이 터스커기(2만6,848달러)라 보도했다. 미국 인구조사국 통계(2010)에 따르면 터스커기가 속한 마콩(Macon) 카운티 주민(2만 1,000여 명)의 약 83%가 흑인(아프리카계 미국인 포함)이다. 고만고만한 마을들이 즐비한 형편일 테니 ‘가장 가난하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어쨌건 터스커기는 18세기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내몰고 흑인 노예들로 목화 플랜테이션 농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오래 차별 속에 방치돼 있던 남부 블랙벨트의 악명 높은 마을 중 한 곳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가 굳이 저 마을을 언급한 데는 다른 뜻이 있었을지 모른다. 인류 의료윤리 역사상 최악의 국가범죄 중 하나로 꼽히는 흑인 매독 생체실험이 만 40년 동안이나 자행된 곳이 그 곳이기 때문이다. 모진 차별 속에 미국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편대가 탄생해 2차 대전 유럽 전선에서 보란 듯이 무용을 떨친 이들이 또 그 곳 출신이었다. 보도의 숨은 뜻이 뭐든, 저 이름에서 부채감이나 아린 죄의식을 느꼈을 미국인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을에 1882년 오두막 교사(校舍)로 문을 연 전통 흑인학교(HBCUㆍHistorically Black College and University, 이하 흑인학교), 터스커기 대학이 있다. 벤저민 페이턴(Benjamin F. payton)은 개교 100주년이던 1982년, ‘Institute(학원)’란 명칭을 달고 있던 그 무명 대학 5대 총장에 취임해 웬만한 일반 대학과도 경쟁할 만한 오늘의 종합대학으로 키워낸 교육자이자 인권 운동가다. 가난한 사립대 총장이었던 그는, 한 푼 예산과 개인의 출세를 위해 권력에 빌붙어 교육자의 양심을 저버리기도 하는 이들과 달리, 미국 대통령까지 머리 숙이게 만들며 저 도드라진 업적을 이뤘다. 그는 연방 정부와 미국의 민주주의가 터스커기에 진 빚을 갚으라고 당당히 요구했고, 그럼으로써 소수자 교육의 당위와 가난한 그의 마을, 그리고 남부 흑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함께 지키고자 했다. 벤저민 페이턴이 9월 28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1932년 미국 보건부 산하 공공보건국(PHS)은 터스커기에서 매독 현장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매독은 80년대 AIDS 만큼이나 심각한 질병이었고 뾰족한 치료법도 없었다. PHS가 내건 연구 목적은 치료ㆍ예방이었지만, 실제 의도는 매독균 감염 메커니즘과 인체 영향을 관찰하는 거였다. 그 시절에도 터스커기는 그들이 보기에 가장 만만하고 뒤탈 없을 곳이었다. PHS 성병분과 책임자 존 헬러(John Heller)가 실험을 총괄했고, 존 커틀러(John Cutler)가 현장을 지휘했다.

PHS는 실험 집단을 모집하며, 일상적인 부상과 질병도 무료로 진료해주고 내원 당일 교통편과 식사 제공도 약속했다. 사망 시 부검을 허락하면 얼마간의 사례와 장례비를 지원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PHS는 서로 하겠다고 손을 든 이들 가운데 나이 등 조건이 맞는 399명의 매독 감염자와 201명의 통제군 등 600명의 실험집단을 선발했다. 모두 남성이었고, 당연히 흑인이었다.

미 연방 공공보건국은 1932년부터 만 40년간 터스커기대학 구내 병원에서 야만적인매독실험을 벌였다. 위키피디아.

이름 없던 흑인학교 총장

노예학교 후신 터스커기大 부임

아이비 학맥ㆍ혁신 정책 바탕

일반 대학 못잖게 업그레이드

실험은 1972년까지 만 40년간 지속됐다. PHS가 환자에게 준 약은 치료와 무관한 영양제 같은 거였다. 1947년 페니실린의 매독 치료 효능이 입증됐지만 그들은 치료를 받지 못했고, 그런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PHS는 피실험자가 다른 진료기관을 일절 이용하지 못하게 통제했고, 2차대전 징집 신체ㆍ건강검진에서도 배제시켰다. 병이 나으리라 기대했을 적지 않은 이들이 그 과정에 숨져갔고, 또 많은 가족들이 매독균에 감염됐다.

진상이 폭로된 건 1972년 7월 25일이었다. PHS 직원이던 젊은 전염병학자 피터 벅스턴(Peter Buxtun, 1937~)은 수 차례 문제 제기가 묵살되자 ‘워싱턴 스타’ 기자 친구에게 저 사실을 제보했다. 세계가 경악했다. 보건 의료 법률 종교 등 분야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된 연방 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그들은 그 해 10월 “(터스커기 실험은) 윤리적으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요지의 조사보고서를 냈다. 실험이 공식 중단된 건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이듬해 여름 피실험 주민과 희행자 가족들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 900만 달러의 보상금과 생존자 및 가족들의 무료 진료 조건에 합의했다.

터스커기 매독 실험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이들 중 감옥에 가거나 자격을 박탈당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예 기소된 이조차 없었다. 미국 정부도, PHS도, 누구도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책임 소재를 낱낱이 밝히기 부담스럽기도 했겠지만, 가난한 마을의 흑인 성병 환자의 인권보다 더 중요한 사안(워터게이트)으로 미국이 요동치던 때였다. 실험 책임자들은 오히려 ‘대의’로 당당했다. 피츠버그대 교수를 지낸 커틀러는 1993년 노바(Nova)의 다큐멘터리 인터뷰에 출연, 그들에게 페니실린을 투여하면 연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피실험자는 치료받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가 40년대 과테말라 교도소 재소자 매독 연구땐 고의로 감염시키기도 한 사실이 그의 사후인 2008년 밝혀지기도 했다. 미국 국립암연구소 소장을 지낸 헬러 역시 “당시 의사들과 민간 봉사자들은 각자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과학의 영광을 위해 지시를 이행했다”고 말했다.

물론 터스커기 매독 실험은 나치와 일제 생체실험 이래 최대 의학 연구 스캔들로 깊은 상흔을 남겼다. 미국 정부가 소수자 의료복지에 보다 기민해진 계기가 됐고, 실험 내용 고지 및 동의 의무화 등 임상실험의 윤리적 규제도 강화됐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는, 보상과 대책과 숭고한 대의 속에 묻혀갔다.

그 어두운 과거를 다시 들춘 게 1996년 ‘터스커기 매독연구 유산위원회’였다. 위원회는 40년 실험의 국가 책임을 따져 물으며 미국 정부를 대표해 대통령의 공개ㆍ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이듬해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TV 카메라 앞에 나서서 실험 피해 당사자와 가족들, 터스커기 대학과 아프리칸아메리칸 공동체에 용서를 빌었고, 터스커기대 국립 의료윤리 연구센터 설립을 약속했다. 그 위원회를 이끈 게 벤저민 페이턴 총장이었다. 그는 “사람들은 그 ‘끔찍한 일(monstrous thing)’을 ‘터스커기 실험’이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실험 주체는 터스커기가 아니라 미국 공공보건국이다.(…) 국가의 사과는 너무 오래 지체돼 왔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미국 최초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의료윤리센터로 99년 5월 출범했다.(encyclopedia.com)

페이턴은 1932년 12월 27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오렌지버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Leroy Ralph Payton)는 침례교 목사이자 농부 겸 교사였다. 그는 흑인이 범죄에 빠지지 않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좋은 교육을 받는 것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진 이였고, 9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냈다. 벤저민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사회학과(55년)를 나와 하버드에서 다시 종교철학을 전공했고, 콜럼비아대에서 철학 석사를, 예일대에서 윤리학 박사 학위(63년)를 받았다. 그가 학비 비싼 아이비리그 대학서 저 많은 학위를 받은 것은, 물론 빼어난 학생이기도 했지만, 소수자 교육ㆍ취업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 덕도 컸을 것이다. 그는 콜럼비아대 재학 시절인 58년 사회사업학 석사과정에 있던 동갑 여성 셀마 페이턴(Thelma Payton, 1932~2013)을 만나 이듬해 결혼, 54년간 부부로 지내며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를 도왔다. 셀마가 앨라배마와 코네티컷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뉴욕 등지를 다니며 가족과 여성 청소년 복지를 위해 일하는 동안, 벤저민은 워싱턴D.C의 하워드대 조교수(63~65), 뉴욕시 종교ㆍ인종 위원회 디렉터(65~66), 미국 교회협의회(NCC) 사회정의국 종교ㆍ인종위원회 사무총장(66~67) 등을 거치며 교육 및 흑인 인권 운동가로 살았다. 35세이던 67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흑인학교인 베네딕트대 역대 최연소 총장에 뽑혀 72년까지 재직했고, 이후 10년간은 뉴욕 포드재단 고등 교육ㆍ연구 분과 책임자(program officer)로 일했다.(legacy.com) 뉴욕타임스는 그가 63년 워싱턴 시민권행진 조직 사업에 관여하는 등 사이사이 다양한 흑인 인권 운동에도 발벗고 나섰다고 소개했다.(NYT, 2016.10.11)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했다. 감세와 정부지출 감축을 골자로 한 그의 경제정책(레이거노믹스)은 흑인학교에 치명타였다. 흑인학교란 미국 남북전쟁 이후 종교단체나 개인이 노예나 노예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한 학교들의 통칭이다. 1965년 고등교육법 개정으로 정규 학교로 위상이 높아지긴 했지만 대다수가 교육의 질이나 입학생 수준, 교직원 처우 등 면에서 대체로 열등한 학교로 통한다. 미국 흑인대학은 현재 총 107개로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남부 19개 주 흑인 마을에 분포해 있다. 국고 보조금 의존율이 높은 만큼 연방 교육예산 감축은 학교 존립이 걸린 문제였다. 터스커기대가 5대 총장 모집 공고를 낸 게 1981년이었다.

뉴욕서 고액 연봉을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던 페이턴에게 총장 지원서를 내보라고 권한 건 흑인 침례교 목사겸 인권운동가로 흑인대학 모어하우스대 총장을 지낸 벤저민 메이스(Benjamin Mays, 18944~1984)였다.(montgomeryadvertiser.com, 16.9.30) 그가 권한 건 영예가 아니라 봉사와 헌신의 기회였다. 페이턴은 2010년 6월 은퇴할 때까지 만 28년간 학교를 지켰다.

페이턴이 터스커기대를 HBCU 대학 순위 5위권으로 격상시키며 일반 대학과 경쟁할 수 있게 한 과정을 세세히 알기는 힘들다. 대학측 자료에 따르면 그는 취임 직후인 85년 학교 위상 제고를 위해 동창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스티튜트’를 ‘유니버시티’로 변경했다. 흑인대학으로선 선도적으로 박사학위 과정을 개설했고, 비즈니스ㆍ정보과학대학과 보건교육센터, 켈로그 컨퍼런스센터 등을 유치했다. 캠퍼스 정비, 건물 신축, 교육프로그램 개설…. 모두 돈이 드는 일이었고 그의 학맥과 포드재단 인맥이 기금 모금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항공우주연구센터 건립도 그의 업적 중 하나였다.

1941년 터스커기에서 탄생한 미국 최초 흑인 전투비행단. 그들은 극심한 냉대와 멸시를 견디며 2차대전 유럽전선에서 ‘레드 테일 에인절스’의 전설을 창조했다. Tuskegee.edu
어두운 과거를 밝혀내다

실험 종료 24년 만인 1996년

유산위원장 맡아 책임 묻고

클린턴 대통령 결단 이끌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흑인우대’정책 가운데 대표적인 게 소수인종 고용 확대정책이었다. 루스벨트는 1939년 터스커기 대학부지 내 ‘모턴 필드(Moton Field)’에 미 육군항공대 훈련기지를 창설, 흑인 파일럿을 양성토록 했다. 군대 내 인종 차별로 흑인이 전투기를 모는 건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41년 모턴 필드 출신 흑인 조종사 13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흑인비행전단(제99 전투비행단)이 꾸려졌지만 백인 지휘관들은 그들에게 지상 보조업무만 맡겼다. 흑인 전단이 유럽 전선에 투입된 건 44년 6월, 직접 의회에 청원까지 하고 나서부터였다. ‘제332 비행전대’내 ‘터스커기 비행대’로 재편된 그들은 꼬리를 붉게 칠한 P-51 머스탱을 몰고 그 해 10월 대 독일전에서 전대 최초의 에이스를 배출하는 등 신들린 듯 전공을 세우며 미 공군 교범에도 수록된 ‘레드 테일 에인절스(Red Tail Angels)’의 전설을 낳았다. 페이턴은 ‘모턴 필드’의 역사지구 지정을 끊임없이 요구, 98년 의회 승인과 함께 항공우주센터 설립 예산을 따냈다.

레이거노믹스 초기인 81년 12월 뉴욕타임스는 ‘흑인대학,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긴 분석기사를 실었다. 60년대 이후 인종분리 관행이 약화하면서 흑인들의 일반대학 입학이 활발해졌고, 그 결과 70년 흑인 학생의 흑인대학 진학 비율(2/3)이 80년 무렵 1/5로 줄었다는 이야기, 일부 백인과 흑인여성 대학 진학이 늘긴 했지만 자립 기반은 오히려 약화했고, 정부 지원이 줄어들 경우 존립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거였다. 그 무렵 대학 신입생 가계 평균 소득은 백인 2만1,500달러, 흑인은 9,700달러였다. 그 차이는 등록금의 차이이자 대학 재정의 차이였다. 지금도 틈만 나면 제기되는 흑인학교 지원의 역차별 논란, 흑인대학이 오히려 인종주의를 강화한다는 비판이 그 시절에도 없지 않았다. 하워드대 출신 흑인 인권운동가 케네스 클라크(Kenneth B. Clark) 같은 이도 “흑인 학생들이 흑인 대학을 편하게 여기는 것은 노예들이 노예제에 자족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는 “흑인 교육가들은 상당수 흑인 학생들이 백인 학생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흑인대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거야 말로 인종주의적 발언이다. 만일 그렇다면 대학이 아니라 흑인 초등ㆍ중등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페이턴 등 흑인대학 옹호론자들은 클라크 등의 주장에 대해 역사와 현실을 도외시한 원론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들은 거꾸로, 흑인대학이 열등한 것은 만성적 예산 부족과 열악한 교육환경, 열등한 처우에서 비롯된 우수 교원 수급 문제 등의 결과라고, 일반 대학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이턴은 흑인대학의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펼쳐 보임으로써 나머지 대학들이 예산 증액을 요구할 수 있는 근사한 근거 하나를 선사했다. 루이지애나 세비어 대학 총장이던 노먼 프랜시스의 말- “모든 꽃이 봄의 첫날 한꺼번에 피지는 않는다”-이 아마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다만 ‘월스트리트 24/7’이 전한 대학마을 터스커기의 여전한 가난은, 아무리 혼자 발버둥 쳐도 안 되는 일이 있음을 더불어 일깨우는 계기였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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