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입학하고 가장 먼저 학습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한글을 깨우치는 일이다. 한글 자모를 익히고 자모의 조합을 통해 생각과 말이 시각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한글 알파벳을 다 익혔다고 해서 자기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칠판에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라는 문장을 쓰셨다. 어떤 친구가 “아버지, 가방에 들어 가셨다”라고 말하자 친구들이 모두 웃었다. 다른 똑똑한 친구는 “아버지가 방에 들어 가셨다”라고 읽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한글 자모로 이루어진 글자는 그 의미를 온전히 알기 위해선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공간) 아버지가 (공간) 방에 (공간) 들어가셨다.(점)”이라고 읽으셨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라는 문장의 정확한 의미는 글자와는 상관없는 공간(空間)을 이해하고 이 문장이 마쳤다는 부호 점(.)을 붙여야 비로소 정확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도 이 공간의 의미를 깨닫고 애플 컴퓨터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는 죽기 몇 해 전, 미국 서부에 위치한 한 명문대학으로부터 졸업식 축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자신이 췌장암 선고를 받고 회복하고 있는 상태여서, 그의 연설은 죽음조차 초월하려는 용기와 간절함이 스며있었다. 그가 행한 축사의 제목은 “인생의 흩어진 순간의 점들을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흐르는 물처럼 무심하게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우리는 과거라고 부른다. 과거는 수많은 점에 대한 기억이다. 천재들은 그 흩어진 점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고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선율로 만들어 연주한다. 잡스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과거의 점들은 불행했다. 아버지는 시리아 무슬림이고 어머니는 미혼모였다. 그러나 이런 환경은 그의 천재성을 자극하고 드러내는 스승이 되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신의 대학교육을 시키려는 노동자 양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대학을 한 학기만 다니다 중퇴한다. 그는 그 학교에서 우연히‘글자체’수업을 듣고, 자신만의 ‘공간’을 발견하였다. 그는 글자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글자 자체가 아니라,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空間)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는 축사에서 말했다. “저는 세리프와 산세리스 서체를 배웠습니다. 서로 다른 글자 조합의 공간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 공간은 위대한 활자체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그 공간은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으로 미묘하여 과학으로는 포착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공간에 매료되어있습니다.” 이 공간은 우주를 낳은 어머니 같은 존재다.

기원전 6세기 한 이스라엘 작가는 우주를 창조한 빈 공간에 대해 말한다. 그는 이 공간을 고전 히브리어로 ‘토후 와-보후’(tohu wa-bohuㆍ‘창세기’ 1,2)라고 이상한 문장으로 소개한다. 그는 상상을 통해 자신이 볼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빅뱅 이전의 상태를 묘사한다. 사람이 입김을 세차게 불어낼 때, 뱃속부터 나오는 공기 소리와 그 후에 지친 허무한 공간을 의성어로 표현하였다. 그것이 ‘토후 와-보후’다. 이 난해한 구절을 후대 사람들은 “행태가 없고 비었다”라고 번역하다. 기원전 8세기 고대 그리스에 우주창조를 기록한 헤시오도스라는 작가가 있었다. 그는 ‘신통기’라는 책에서 이 공간을 ‘카오스’(chaos)라고 불렀다. ‘카오스’는 흔히 ‘혼돈’이라고 번역하지만 원래 의미는 ‘공허’다. 이 ‘공허’가 하늘을 생성시켰다. 혼돈을 상징하는 물들을 갈라 ‘위에 있는 물’을 하늘로 ‘아내 있는 물’은 바다로, 바다에 드러난 고체를 땅이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이 공간을 ‘티마이오스’에서 이 커다란 빈 그릇으로 묘사한다. 그는 이 공간을 고대 그리스어로 ‘코라’(chora)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공간이지만, 역설적으로 우주 만물을 생성시키는 공간이다. 만물을 이 공간을 통하지 않고는 생겨나질 않는다. 코라는 어머님의 자궁과 같아 어둡고 축축하고 익숙하지 않지만, 태아에게 자양분을 공급하여 점에서 시작한 인간에게 형태와 숨을 부여하는 거룩한 공간이다.

공간(空間)은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집이다. 공(空)을 뜻하는 한자는 원초적인 태초의 빈 공간을 의미하는 ‘혈’(穴)과 하늘과 땅을 끌어당겨 신비한 물건을 만드는 기술인 ‘공’(工)이 합쳐졌다. 공(空)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에게 알게 모르게 쌓인 이기심과 욕망이라는 괴물을 제거하고 이타심과 열망으로 채우려는 혁신적인 마음의 상태다. 간(間)은 자신의 이기심을 넘어, 주위의 다른 개체들 사이에서 이들의 가치만을 빛나게 만들려는 착한 마음씨다. ‘공간’은 혼자만의 고독을 통해 위대한 자신을 발견하는 마술의 장소다.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보잘것없는 조건을 시대를 위한 위대한 임무로 담금질하는 수련의 장소다. 당신은 그런 공간이 있습니까. 그런 공간을 만드실 생각이 있습니까.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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