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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기자, 쓰지 못한 이야기] 저한테 왜 그랬어요

입력
2016.10.23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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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경찰서 1별관 3층 강력팀 입구 유리문이다. 아무리 배짱 좋은 피의자라 하더라도 저 문을 통과하면 주눅 들기 마련이다. 추석연휴 때 만난 강모씨도 저 곳에서만큼은 자신의 범죄사실을 모두 자백했다.
서울 구로경찰서 1별관 3층 강력팀 입구 유리문이다. 아무리 배짱 좋은 피의자라 하더라도 저 문을 통과하면 주눅 들기 마련이다. 추석연휴 때 만난 강모씨도 저 곳에서만큼은 자신의 범죄사실을 모두 자백했다.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를 만난 건 추석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9월 18일 일요일 오후 10시 서울 구로경찰서 주차장이었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세련된 옷차림을 한 20대 남성은 막 강력팀에서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냄새를 맡았습니다. 기사 냄새를 말이죠. ‘저 사람 뭐 있다.’ 정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를 달려가 붙잡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신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DJ로 소개했습니다. 견습기자 생활을 2개월 했다고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생기긴 생겼나 봅니다. 그는 3주 전 자신의 음악 작업실에서 동료 작곡가에게 450만원짜리 DJ 믹싱기계를 도난당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단독]유명DJ 고가의 음악장비 도난 당해’라는 기사 제목이 떠올랐고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계속되는 질문에도 그의 답변은 막힘 없었습니다. 이름은 강모(27)씨, 직업은 DJ, 작업실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전세 2억 8,000만원의 18평짜리 오피스텔, 집은 구로구 구로동 A아파트, 용의자는 3년 전 음악적으로 도움을 받아 알게 된 작곡가 심모(27)씨, 절도 사건 발생 당시 이태원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강씨는 작업실을 빌려도 되냐는 심씨의 부탁을 들어줌, 이틀 뒤 작업실에서 믹싱기계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작업실 내 폐쇄회로(CC)TV를 통해 기계를 훔쳐가는 심씨 발견, 9월 18일 신고….

그렇게 강씨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아이디를 공유하고 헤어졌습니다. “오늘 반가웠습니다. 한국일보 김정현 기자입니다.” “아…네 아까는 당황스러워서… 사실 ㅋㅋ 뛰어오시는 소리듣고 불안해서… 무시하려다가….” “나중에 이태원 좋은 곳 알려주세요.” “가끔… 좋은 거 있으면 조용히 알려드릴게요. 주말까지 일 하시고 수고하세요. ^^” 피해사실도 알려주고 이태원 핫한 장소도 알려준다는 친절한 DJ 강씨. 내일 아침 일진선배에게 이 내용을 보고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강씨를 만난 그 날 밤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습니다.

‘말해 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는 영화 ‘달콤한 인생’ 명대사 중 하나다.
‘말해 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는 영화 ‘달콤한 인생’ 명대사 중 하나다.

다음날 오전 5시에 일어나 포털사이트에서 강씨를 검색했습니다. 이상합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대라 검색이 안 되는 걸까요. N에도, D에도, 심지어 G에도 DJ 강씨 인적사항은 검색이 안됐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강력팀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젯밤에 강모씨 온 거 맞죠?” “지인이 물건 훔쳐 가서 온 거라고 하던데 맞죠?” “CCTV 제출해서 용의자 특정된 것도 맞고요?” 다른 사람을 조사 중이라 몇 가지 질문밖에 못 했지만 모두 “맞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선배의 추가 취재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강씨가 유명하다면 얘기가 된다는 설명도 뒤따랐습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해줄 수 있는 다른 경찰 관계자를 찾아갔습니다. “강모씨 유명 DJ 맞나요?” “강씨? 그게 누구지. 처음 들어보는데?” “에이, 왜 이러세요. 강력팀에서 다 알고 왔어요. 말해주세요.” “아니야. 진짜 몰라. 걔가 누군데?” 사건개요를 모두 말해주니 그 관계자는 컴퓨터 자리로 가서 강씨의 이름을 검색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크게 웃었습니다. “김 기자가 속은 거 같은데? 걔가 피의자야!”

강씨. 그는 유명한 사람도, DJ도 아닌 피의자 신분의 사회복무요원이었습니다. 애초부터 전세 2억8,000만원짜리 이태원 작업실이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살고 있다는 구로동 A아파트는 범행장소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지인의 지갑과 현금을 훔쳤고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 장면이 엘리베이터 CCTV에 담겨 덜미를 잡혔습니다. 지인이 신고해 추석연휴 마지막 날 피의자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에서 출석한 것이고요.

일진선배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웃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김 기자 이렇게 작은 사건이니 망정이지 더 큰 사건이었어 봐. (오보 냈으면) 어쩔 뻔했어. 교훈이라고 생각해요.” 경찰 관계자가 오히려 저를 위로했습니다. 절도 혐의를 시인한 강씨는 지난달 검찰에 송치됐습니다.

되돌아 보면 제 취재수첩에 ‘팩트’는 없었습니다. 대신에 고작 2개월 견습기자 생활 끝의 어설픈 ‘감’이 있었죠. 강씨 입에서 DJ라는 말이 나왔을 때 저는 단독기사에 눈이 멀어 팩트를 확인해야 하는 기자의 본분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단독기사를 놓친 점은 아쉬웠지만 사실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점은 교훈이었습니다. 사실이 진실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 객관성과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크로스체크라는 과정입니다.

피해자라 하더라도 그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강씨는 피의자였고요. 물론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큰 교훈을 얻게 됐습니다. 사소한 팩트라도 크로스체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기자가 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덕목이라는 것을요.

그래도 강씨에게 하나는 물어봐야겠습니다.

“말해 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글ㆍ사진=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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