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같은 하얀 집을 보여주기 위해 산토리니 주민들은 수시로 하얀색으로 페인트를 칠한다.

새하얀 집과 짙푸른 지중해, 진분홍의 부겐빌레아 꽃. 그리스 산토리니는 눈부신 색의 향연을 보여준다. 아기자기한 집들은 표백제로 세탁한 깔끔한 와이셔츠처럼 하얗다. 산토리니로 떠나기 전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어쩌면 이렇게 집들이 눈부시게 하얄 수 있을까 궁금했다. 공기가 맑고 깨끗해 산토리니의 하얀 벽은 때도 타지 않나 보다 싶었다. 하얗게 벽을 유지하는 비법이 따로 있거나.

산토리니에서 머물던 일주일간 매일 아침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어느 날 골목 모퉁이를 도는 순간, 물음표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집주인이 흰 페인트가 듬뿍 묻은 롤러를 들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벽을 열심히 칠하고 있었다. 옆집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페인트인지 살펴봤다. 보통 페인트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사시사철 ‘까사 비앙카’(하얀 집)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페인트칠할 뿐이었다. 사진에서 본 그림 같은 장면은 부지런함이 만들어낸 낭만이었다.

모로코의 오래된 도시 페즈에서의 일이다. 중세의 모습을 품고 있는 페즈는 수 세기 동안 전통을 고수해온 가죽염색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페즈로 이끌었던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태너리(Tannerie)라고 불리는 염색공장 사진이었는데, 보자마자 “여기 가고 싶어”라고 소리칠 정도였다.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준비된 팔레트 같은 풍경이 더 없이 매력적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동네에 들어섰다.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어서인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오히려 코가 먼저 반응했다. 어디에선가 좋지 않은 냄새가 강하게 풍겨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갔다. 시각은 그제야 반응했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곳이 그리도 찾아 헤매던 태너리였던 것. 냄새는 염료에서 나오고 있었다. 옛날에 사용하던 비둘기 똥이나 동물의 지방 같은 염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냄새가 지독한 것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구멍에 들어가 무두질한 가죽을 열심히 밟고 있었다. 화려한 사진만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냄새 때문에 한 시간도 채 머무르지 못했지만, 그때 느낀 사진에서 보여준 이미지와 현실의 간극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지난주에는 전남 순천시에 다녀왔다. 가을의 순천만은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순천만 갈대밭과 S자 물길은 ‘역시 순천만’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눈길이 갔던 곳은 순천만습지 주변 논밭이었다. 예전에 비해 뭔가 달라진 것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든 이유가 흑두루미 때문이라는 것을 순천 토박이에게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천연기념물 제228호인 흑두루미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새로, 시베리아에서 살다 겨울이 되면 아래로 내려온다. 수십 년 전에는 낙동강 하구에서 겨울을 보내곤 했는데, 낙동강 서식지가 훼손되자 일본 규슈(九州) 이즈미(出水)시로 떠나버렸다. 순천만에도 겨우 몇십 마리가 찾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산에서 상처 입은 흑두루미 한 마리가 발견됐다. 주민들은 흑두루미인지도 모른 채 흑두루미에게 먹이를 주고 키웠다. 이것을 우연히 본 조류학자가 원인을 찾기 위해 나섰다. 조사해 보니 범인은 전깃줄이었다. 철새들이 논에서 먹이를 먹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놀라서 파닥거리는데, 그때 전깃줄에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순천시는 철새들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 철새가 날아오는 논밭에 설치된 전봇대 282개를 없애고 전선을 땅에 묻었다. 오랜만에 본 논밭이 더 시원하게 느껴진 것은 철새 보호를 위해 사라진 전봇대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알았는지, 매년 더 많은 흑두루미가 겨울을 보내기 위해 순천으로 왔다. 1996년 59마리가 왔는데, 2015년에는 무려 1,432마리가 순천만으로 날아왔다. 흥부네 제비처럼 흑두루미도 순천만에 복을 가져다주었다. 흑두루미가 많이 찾자 순천만은 생태 도시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고 더 많은 이들이 순천만을 찾게 되었다. 황홀한 S자형 일몰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순천을 더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멋진 사진은 사진 자체로 큰 힘을 갖는다. 그러나 사진만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팔딱팔딱 뛰는 에너지와 끝없는 인간의 노력, 굽히지 않는 의지 같은 것들이다. 사진 속에 숨어있는 진정한 이야기를 만나는 것, 이것이 여행하는 이유다.

채지형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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