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니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다. 당시 막 유행하고 있던 토론 중심의 수업 시간, ‘낙태는 허용되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토론이 진행됐다. 나는 낙태 반대 측에 섰다. 특별한 신념이 있어서 반대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냥 어디선가 읽은 일화가 있었고 그걸 소개하기에 딱 맞는 입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편에 선 것이다. 그 일화는 이제 유명해진 베토벤에 관한 것이다. 이미 여덟 아이가 있고 그중 일부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매독을 앓고 있는 여성이 아이를 가진 상황이라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낳지 말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낙태를 하겠다’고 대답한 이들에게, 근엄하게 선언하는 것이 이 일화의 백미다. “당신은 베토벤을 죽였습니다.”

어린 나 또한 근엄하게 이 일화를 말했던 것은 확실하지만, 당시 토론의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어린 시절의 창피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요새 ‘낙태죄’에 대한 논의에 다시 불이 붙으면서 여전히 근엄하게 “당신의 낙태가 베토벤을 죽이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 일화의 반례에 “당신은 히틀러를 낳았습니다”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지 않더라도, 그들 역시 언젠가는 이 말이 왜 창피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수정된 배아로부터 태아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어느 단계에서부터 생명으로 보아야 하는지조차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낙태 반대, 생명의 소중함을 외치는 이들이라면 영영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지난 15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신각에 모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찬송가 ‘마귀들과 싸울지라’를 개사해 노래했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곧 승리하리라” 인공임신중절 시술이 ‘비도덕적 진료 행위’ 항목에 포함된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개정안’ 입법 예고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노래였다. 19일, 보건복지부가 불법 낙태수술을 한 의사에 대한 처벌강화 계획을 백지화하면서 낙태 금지법에 대한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후퇴를 되돌린 원점이기에 그저 원점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 위하여 이제 낙태가 국가가 규정한 형법상의 죄가 되는 현실에 대해 논의할 차례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베토벤 일화를 꺼내는 사람들과는 토론하고 싶지 않다. ‘일단 낳으면 어떻게든 된다’는 사람과도 마찬가지다. 한 생명이 탄생 후 짊어질 삶의 무게에 대한 고민을 찾아볼 수 없는 무책임한 말들로 인해 ‘일단 낳기’까지 한 여성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낳은 이후에 여성에게 전가되는 책임이 모두 축소되고 있다. 무엇보다 한 ‘나의 몸은 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논의는 원점을 넘어설 수 없다. ‘내 몸에 대한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지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 자궁을 가진 한 사람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겠는가.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라는 문장에 그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비로소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일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에 대해서, 왜 ‘낙태죄’라는 말이 그 자체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단어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낙태죄’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에 베토벤은 필요 없다.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가진 사람, 여성이 있을 뿐이다. 국가와 사회가 응답해야 할 대상 또한 태아가 아닌 여성이다. ‘낙태죄’가 폐지되어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자율성과 권리를 갖게 되고, 사회가 임신과 출산을 포함한 여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면 출생률에 목을 매는 이 사회 또한 여성과 함께 자유케 될 것이다. 이 원점에서의 시작이 부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를 바라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30대 비혼여성으로서 내 삶의 자리에서 외친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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