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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동물원과 동물 복지

입력
2016.10.1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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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향기를 머금은 따스한 정종 한 잔처럼 인생에 찾아든 사랑 이야기.” 시인이자 철학자인 서동욱 교수는 일본 만화 거장 다니구치 지로의 대표작 ‘선생님의 가방’을 이렇게 평했다. 그렇다. 다니구치 지로를 만든 것은 사랑이었다. 그 출발점은 작가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 ‘겨울 동물원’이라는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에는 동물원의 풍경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만화를 보는 내내 겨울 동물원 풍경에 따뜻하게 안겨 있는 착각에 빠진다. 동물원은 그런 곳이다. 동물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평화롭고 사랑스럽다. 직장인 밴드 동물원의 노래가 그렇고,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런 느낌은 만화와 노래와 영화에서나 그렇다. 하지만 실제 동물원은 꽤 참혹한 곳이다.

2014년 2월의 일이다. 덴마크 코펜하겐 동물원은 ‘마리우스’라는 이름의 18개월 된 어린 수컷 기린을 전기충격기로 사살했다. “다른 암컷 기린과의 근친교배를 막는다”는 이유였다. 맞다. 근친교배로 태어난 생명체는 일반적으로 질병에 취약한 게 사실이다. 이때 대중들은 동물원의 변명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근친교배를 막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여긴 것이다. 과연 그럴까. 유럽의 다른 동물원에는 이미 700마리 이상의 기린이 있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마리우스의 형제자매들이다. 서커스단에 팔려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프리카 야생으로 되돌려 보내면 어땠을까. 소용없는 일이다. 야생 적응 훈련을 받지 못한 동물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코펜하겐 동물원의 정책은 나름대로 타당한 것이었다.

정작 충격적인 일은 따로 있었다. 동물원은 어린이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린 사체를 해체했다. 물론 여기에도 이유는 있다. 동물원은 기린에 관한 해부학적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사실과 다르다. 그들은 해부한 게 아니었다. 단지 조각조각 잘라냈을 뿐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동물원은 조각난 기린 사체를 사자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줬다. 그들이 약물주사를 이용해서 마리우스에게 고통 없는 안락사를 허락하는 대신 전기충격기를 써서 고통 속에서 죽게 한 이유는 약물로 죽이면 사체가 오염돼 먹이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원은 기린의 개체 수도 줄이고 동시에 육식동물에게 먹일 고기가 필요했다.

오랜만에 조상들이 아프리카에서 먹던 먹이 맛을 본 사자들은 야성을 되찾고 생활형편이 나아졌을까. 기린을 잡은 동물원인데 사자라고 잡지 못할까. 코펜하겐 동물원은 마리우스를 죽인 지 불과 한 달여 후에는 사자 네 마리를 한꺼번에 도살했다. 늙은 사자 두 마리와 새끼 사자 두 마리였다. 이번에도 이유는 있었다. 동물원은 새로운 젊은 수사자 한 마리를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늙은 두 마리는 세대교체를 위해 사라져야 했다. 새끼 사자 두 마리는 어차피 젊은 수사자에게 죽임을 당할 게 틀림없으니 안전하게 죽인다는 게 동물원의 주장이었다.

코펜하겐 동물원이 유별나게 잔인한 동물원일까. 그렇지 않다. 코펜하겐 동물원은 유럽의 345개 동물원과 수족관이 소속된 유럽동물원수족관협회(EAZA)의 지침을 따랐을 뿐이다. 협회는 멸종위기종의 보존과 생물 다양성 확보를 위해 동물을 안락사하라는 지침을 정했다. 코펜하겐 동물원의 연구보존 책임자 역시 “동물의 근친교배를 막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동물의 건강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동물원을 옹호하는 일부 전문가들은 “동물원은 디즈니랜드 같은 테마파크가 아니다. 인간들에게 점차 서식지를 빼앗기고 있는 동물들의 마지막 생존 보호처”라고 말한다. 코펜하겐 동물원 외에도 EAZA 소속 동물원에서만 매년 1,700마리 이상의 얼룩말, 들소, 영양, 하마 같은 대형포유류들이 안락사를 당하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근친교배 방지, 노화와 질병, 그리고 공간 부족 등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근친교배가 이유인 경우는 1%도 안 된다. 대부분은 공간 부족 때문에 죽이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동물원 바깥에서 벌어지는 동물 쇼다. 서커스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생각해보자. 곰이 두 발로 행진한다. 원래 네 발로 다니는 곰을 두 발로 익숙하게 걸어 다니게 하기 위해 새끼 때부터 벽에 달린 짧은 줄에 곰의 목을 매어 놓는다. 곰이 네 발을 딛는 순간 목이 졸린다. 계단 위를 오르고 불타는 링을 통과하는 사자와 호랑이는 어떨까. 태어나자마자 그들은 인간의 고문을 견뎌야 한다. 본성을 잃고 인간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매일 매질을 당한다. 굶기고 물을 주지 않는 것도 중요한 훈련방식이다. 태국으로 가족여행을 가서 하는 코끼리 트레킹은 어떨까. 이 코끼리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떨어져 꼼짝도 하지 못할 만큼 작은 우리에 갇혀서 온갖 고문을 당한다. 이유는 한 가지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기 위해서다. 코끼리 트레킹을 하기 전에 코끼리 눈 속의 슬픔과 괴로움을 봐야 한다.

쇼와 트레킹을 위해 고통받는 동물을 돕는 방법은 간단하다. 동물 쇼를 관람하지 않고 코끼리 트레킹을 하지 않으면 된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사라지는 법이다. 문제는 동물원이다. 동물원은 당장 없앨 수 없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 지난 5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동물원을 소유하고 있는 서울시는 ‘관람ㆍ체험ㆍ공연 동물 복지 기준’을 발표했다. 여기에 따르면 이제 동물원의 동물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으로부터의 자유 ▦환경과 신체적 불편함으로부터의 자유 ▦고통, 질병, 상해로부터의 자유 ▦정상적인 습성을 표현할 자유 ▦두려움과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동물 복지 기준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를 바란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가서 다니구치 지로가 보여준 사랑과 따스함을 느끼고 싶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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