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아그네스 닉슨

▦작가가 되겠다던 ‘미친 딸’
“타고 난 이야기꾼” 가족 환경
연기ㆍ극작 배우며 작가 꿈 키워
어너 필립스 만나며 현실로
▦‘소프 오페라’에 사회성 담아
상식 벗어난 드라마 극본
스폰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궁암 환자 TV에 등장시켜
▦“누구나의 삶이 곧 드라마다”
연방대법 낙태 판결 기다린 듯
美 최초로 관련 드라마 방영
레즈비언 키스까지 표현해 내
아그네스 닉슨은 소프오페라를 통해 사회의 편견을 고발했고, 그럼으로써 소프오페라의 한계와 편견까지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장르의 태동기에 태어나 성장기에 작가가 됐고, 장르와 더불어 생을 마쳤다. 미국 언론은 그를 소프오페라의 재창조자라며 기렸다. 2001년 에미상 시상식장의 닉슨. wikipedia

지난 7월 뉴스위크는 세상의 편견 때문에 겹으로 고통 겪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기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병을 대장암이라고 속인 한 여성 항문암 환자의 사연으로 시작된다. 딸은 “(어머니가) 항문암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건 고사하고 아예 그 단어조차 못 꺼내게 했다. 대장암이 훨씬 정상적인(normal) 질병으로 보였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항문암이 애널섹스와 관련된 질병이라 여길까 봐서였다. 2010년 암 진단을 받고 2년 뒤 별세한 그 환자의 나이는 불과 53세였다. ‘HPV and Anal Cancer Foundation’에 따르면, ‘HPV(Human Papillomavirusㆍ인유두종바이러스)’는 자궁경부암 외에도 항문암 등 여러 질병의 주요 원인이다. 그 기사는 HPV 예방과 치료의 근황을 소개하며 무엇보다 먼저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유방 자궁 난소 고환 등 질병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옅어지기 시작한 것도 사실 얼마 안됐다. 위 기사에 따르면, 1974년 미국 퍼스트 레이디 베티 포드(Betty Ford, 1918~2011)가 유방암으로 절제술을 받은 사실을 공개한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대장암과 고환암 환자들의 사회적 수치심을 덜어준 일등 공신은 저명한 앵커 케이티 커릭(Katie Couric, 1957~)과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 7년 연속 우승자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 1971~)이었다. 커릭은 아침방송에 출연해 공개적으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암스트롱은 2012년 도핑테스트에 걸려 선수로서 오명을 쓰긴 했지만, 고환암 투병 사실을 밝히며 치료 등을 위한 재단 활동에 공을 들였다.

60년대 미국 인기 TV드라마 ‘Guiding Light’의 수석 작가 아그네스 닉슨(Agnes Nixon)이 극본에 자궁경부세포진검사(Pap Smear)로 자궁암 진단을 받는 환자를 등장시키려 하자 드라마 스폰서였던 P&G(Procter & Gamble)사가 극구 말린 건 당시로선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궁암 진단 이야기를 아침 드라마에 내보내는 게 ‘상식’ 밖 일이었다. 닉슨은 P&G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cancer 암’나 ‘uterus 자궁’’hysterectomy 자궁절제술’ 등 직접적인 단어는 일절 안 쓰는 조건, 다시 말해 ‘비정상적인 세포(irregular cell)’같은 표현으로 극본을 썼다. 64년 그 에피소드가 방영되자 많은 여성들이 감사 편지를 썼다.(latimes, 2016.9.28) 대부분 세포진검사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던 이들이었다. 42세의 닉슨은 그 무렵 자궁암으로 한 친구를 잃었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의학 지식을 드라마의 주 시청자인 주부들에게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nyy, 9.28)

닉슨은 ‘소프 오페라(Soap Opera)’라 불리는 아침 드라마 작가로 60여 년을 일하면서 아동 학대, 주부 알코올ㆍ마약 중독, 동성애, 낙태, 인종차별, 전쟁 등 뜨거운 사회적 현안들을 적극적으로 다뤘고, 특히 동성애와 낙태 등은 근엄한 시사ㆍ뉴스 프로그램보다 먼저 드라마를 통해 이슈화했다. 그럼으로써 ‘소프 오페라’란 말에 스민 경멸적인 뉘앙스, 즉 ‘생각 없는(brainless) 주부 시청자들의 오락용’이라는 편견에도 맞섰다. “소프 오페라를 재발명한 작가(reinvented Soap)”라 불렸던 아그네스 닉슨이 9월 28일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닉슨은 1922년 12월 10일,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생후 2개월 만에 부모가 이혼, 그는 외조모가 살던 테네시 주 내슈빌로 이사했다. 엄마(Agnes Eckhardt)는 일을 해야 했고, 그는 외조모와 이모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아일랜드계 이모들은 타고난 이야기꾼들이었다고 한다. 어린 닉슨은 그 이야기들로 드라마를 만들어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곤 했다고, ‘Creating Television’이란 책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인디애나 주 세인트메리칼리지와 노스웨스턴대에서 연기와 극작을 공부했고, 연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찰턴 헤스턴, 파트리샤 닐 같은 쟁쟁한 급우들에게 기 죽어” 일찌감치 극작가로 선회했다. 그의 학비는 “사업가로는 성공했지만 역겨운 사람(very sick man)”이던 아버지(Harry Eckhardt)가 댔다. 학비가 없어 의대 진학을 포기한 아버지는 시카고 남부에서 수의(壽衣)사업을 벌여 성공했고, 대학 졸업반이던 닉슨에게 자기 회사로 들어오라고 강권했다. 그가 딸에게 당시 ‘소프 오페라의 지존’으로 꼽히던 배우 겸 작가 어너 필립스(Irna Phillips, 1901~1973)를 만나보게 한 것은 닉슨의 꿈을 접게 하기 위해서였다. “미친 딸이 작가가 되겠다니 어쩜 좋겠냐”며 정신과 의사 친구에게 상의했더니 친구가 “내 환자 중에 어너 필립스가 있는데…”라고 해서 벌인 일. 닉슨은 그 면접이 생의 갈림길이었다고, 필립스와 그의 비서가 자신의 습작 원고를 소리 내어 읽는 동안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나랑 일해볼래?”라던 필립스의 말은 닉슨에겐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였다. 1940년대 초 그의 미국이 그러했다.

그는 필립스의 보조작가(대사 담당)가 됐고, 51년 자동차 딜러 로버트 닉슨(Robert Nixon)과 결혼해 5년 사이 아이 넷을 낳아 키우면서 58년 필립스의 수석 작가가 됐다. 62년부터는 ‘The Guiding Light’의 스토리라인을 썼고, 자궁암 에피소드로 파란을 일으킨 건 2년 뒤였다. 조기 종영을 저울질하던 NBC의 ‘Another World’라는 드라마를 맡아 히트시킨 것도 그 해였다. 자신감을 얻은 닉슨은 68년 독립, 남편과 함께 자기 회사를 설립했다. 로버트는 네 아이를 키우던 신혼 때부터 닉슨을 도우며 해로했고, 1996년 별세했다.

ABC가 그에게 파격적인 조건으로 드라마를 의뢰한 게 독립의 계기였다. 그의 첫 드라마 ‘One Life to Live’는 68년 7월부터 2012년 1월까지 만 43년 동안 방영됐다. 10대 청소년의 성과 성병 이야기, 유대인과 이민자들의 이야기, 흑인 이야기…. 시청자들은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시시콜콜한 가정사와 연애 불륜 이혼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간 쉬쉬하던 사회적 금기와 편견을 그의 드라마를 통해 대면하곤 했다.

극중 인물 카를라 그레이(Carla Gray)는 방영 초기 약 6개월간 백인(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행세했다. 병원에서 만난 백인 남성 의사와 연애 끝에 결혼까지 생각하던 그레이는 어느날 흑인 수련의와 사랑에 빠진다.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의 키스신이 방영되자 항의가 빗발쳤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레이 역시 아프리칸-아메리칸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인종차별에 대한 반발로 “Black is Beautiful”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문화운동이 그 무렵 한창이었고, 그 여파로 피부색이 충분히 검지 않으면 이중의 차별을 받던 때였다. 닉슨은 백인처럼 보이는 흑인 신인배우를 찾기 위해 수도 없이 오디션을 봐야 했고, 스태프들은 그냥 백인을 뽑자고 요구했다고 한다. 거의 포기할 무렵 엘렌 홀리(Ellen Holly)라는 무명 배우가 뉴욕타임스에 독자투고를 한다. 밝은 피부를 가진 흑인으로선 연기 기회가 없다는 사연. 닉슨은 홀리에게 그레이 역을 맡겼다. 당시 시애틀의 한 독자는 “백인 여성과 흑인이 키스하는 장면을 어떻게…”라며 항의했다가 진상이 밝혀진 뒤 “그녀가 백인 의사와 키스한 사실을 두고 다시 항의 편지를 썼고, 텍사스의 한 방송국은 카를라 그레이 에피소드를 아예 방영하지 않기도 했다”고, 닉슨은 97년 10월 ‘emmytvlegends’ 인터뷰에서 말했다. 닉슨이 그에게 ‘그레이’라는 이름을 준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레이가 선택한 흑인 수련의는 전통적 의사 가문의 유력 집안이었다. 그레이는 흑인 아이덴티티를 감추고 백인 행세를 했다는 이유로 남자 집안으로부터 배척 당하는 또 한 번의 반전이 드라마에 있었다. 닉슨은 내슈빌의 인종차별을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드라마 'One life to live'의 배우 엘렌 홀리(극중 카를라 그레이). 닉슨은 밝은 피부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그레이의 러브스토리를 통해 인종에 대한 얄팍한 차별의식을 폭로하고 조롱했다. 79년 10월 잡지 'Ebony' 표지의 홀리(왼쪽).

그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방식이 그러했다. LA타임스는 청소년 성병 에피소드가 방영된 직후 약 5만 건의 찬사와 항의의 편지가 쇄도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미국 질병통제센터(CDC)가 “닉슨은 미국의 10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드라마를 통해) 알려주었다”고 공식 논평했다고 전했다.

닉슨이 가장 사랑한 드라마는 70년 방영을 시작한 ‘All My Children’이었다. 위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종교적 광신자는 아니지만 스스로 매우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휴머니티를 믿으며, 그게 내 신앙이다.(…) 신은 모두를 사랑하고, 우리는 모두 형제다.(하지만 우리는 신이 아니어서 무솔리니나 히틀러를 사랑하지는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제목도 ‘All My Children’인 그의 드라마는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랑할 줄 모르는 악당 같은 아버지(극중 애덤 챈들러)와 ‘유기 콤플렉스(Abandonment Complexㆍ버려짐의 피해의식)’를 지닌 영악한 딸 에리카 케인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닉슨 자신도 병적인 유기 콤플렉스를 앓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과 낙태, AIDS, 아동학대, 마약 중독, 동성애…. 1973년 미국 드라마로는 최초로 낙태 에피소드를 마치 연방대법원 판결(Roe V.S Wade, 1973 낙태 허용 판결)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보낸 것도, 2000년 레즈비언 키스 장면을 처음 방영한 것도 그의 저 드라마였다. 닉슨이 케인의 딸 비앙카를 레즈비언으로 설정한 것은 근 20년 전이었다. NPR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는 비앙카가 사랑 받는 캐릭터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엄마인 에리카보다 먼저 시청자들이 비앙카의 성지향을 알게 했고, 모두가 에리카의 반응에 집중하기를 바랐다. (나의 뜻대로) 비앙카는 아침드라마의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캐릭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07년 트랜스젠더 에피소드를 선보였다. ‘All My Children’은 2012년 1월까지 만 41년간 방영됐다.

그는 5번 에미상(Daytime Drama)을 탔고, 5번 미국방송작가조합상을 탔다. 2010년 TV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그해 에미상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여성 최초로 미국방송아카데미 최고 영예라는 ‘Trustees Award’를 받은 건 1981년이었다. 닉슨의 열렬한 팬이자 친구인 위렌 버핏은 1992년과 2008년‘All My Children’에 자청해서 출연했다. 전성기-대부분 전성기였지만- 의 그는 연 평균 100만 달러 이상을 벌었다.

대작 드라마들이 대개 그렇듯 그의 드라마를 전적으로 그의 작품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에게는 걸출한 보조작가들과 스토리 작가들이 있었다. 또 그(의 드라마)의 인기가 사회적 이슈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덕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들도 ‘소프 오페라’라는 말에 담긴 긍정적ㆍ부정적 특징들을 대체로 공유했을 것이다. 시청자들은 각자 누리는 가정과 결혼의 전통적 가치를 드라마를 통해 확인하며 만족하고, 또 극중에서 그것들이 파괴되는 걸 보며 대리만족 하거나 성을 내기도 했을 것이다. 극중 인물인 에리카 케인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6명의 남자와 7차례 결혼했고 혼인 무효로 판결된 4번의 결혼을 더 한 캐릭터다.

닉슨은 자신에게 자유를 안겨준 글을 통해 세상에 자유를 선사하고자 했다. 그는 “사람들의 인식을 내가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내가 느끼는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과 불의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엔터테인먼트와 공익(public service)은 다르다는 말을 나는 어리석게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소프 오페라가 갓 탄생하던 무렵 태어나 성장기에 데뷔했고, 동시대인들과 함께 소프 오페라와 더불어 울고 웃었다. 여성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80년대 후반 이후 아침 드라마 시청률은 급락했고, 그의 롱런 드라마들도 2012년 모두 종영됐다. 2008년 7월 ‘One Life to Live’ 40주년 기념 에피소드에서 그는 40년 동안 출연한 생존 배우들을 회상 등의 형식을 빌어 모두 출연시킴으로써, 이른 고별을 스스로 준비했다. 그는 “모든 이의 삶이 곧 드라마”라고, “늘 절정도 바닥도 아닌, 순간순간을 살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드라마가 종영되자 시청자 항의가 적지 않았다. ‘Prospect Park’라는 온라인 방송사가 두 프로그램을 속방하려다 ABC와의 분쟁으로 무산됐고, 2013년 아이튠스 등으로 방송이 재개됐지만 몇 개월 못 가 11월 끝을 맺었다.

병석의 그는 말이 없었지만, 그런 마무리도 드라마로선 나쁘지 않다 여겼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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