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로버트 팀버그

로버트 팀버그는 미 해병 장교로 베트남전쟁에 참전, 중화상을 입었다. 기자가 된 그는 그 전쟁과 저 얼굴을 이해하고 긍정하기 위해 길고 힘겨운 또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참전 세대와 반전 세대의 뿌리깊은 불화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는 일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2004년 C-SPAN 화면.
-베트남전이 바꿔 놓은 삶
해병 장교로 임무 수행 중
지뢰에 얼굴ㆍ오른팔 3도 화상
재건ㆍ성형수술만 35차례

26세 미 해병 중위 로버트 팀버그(Robert Timberg)는 67년 1월 베트남 전장에서 지뢰에 얼굴과 오른팔 3도화상을 입었다. 35차례 재건ㆍ성형 수술. 전쟁의 뚜렷한 상흔을 얼굴에 지닌 채 전역한 그는 반전 시위로 요동치던 스탠퍼드대를 다녔다. 1970년 기자가 됐고, 2005년 은퇴할 때까지 만 35년간 여러 언론사를 거치며 주ㆍ연방의회와 백악관을 출입했다. 그가 쓴 기사 중에는 미국의 군사외교와 전쟁에 관련된 영광과 수치의 기사도 적지 않았다.

캠퍼스와 거리의 낯선 이들의 무례한 응시에 화를 내버린 날에도, 베트남전 미군의 잔악행위를 고발하는 기사를 쓴 날에도, 해군사관학교 동기생과 해병 전우들이 개입된 레이건 행정부의 이란콘트라 스캔들 기사를 쓴 날 밤에도,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봐야 했을 것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쉬웠을 합리화 또는 자기부정에 투항하지 않으면서, 해병 베테랑으로서의 자부심과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존감을 화해시키려 애썼다. 긍지와 수치, 분노와 자괴를 넘나드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내면의 전쟁. 그가 자신과 제 동료들의 이야기를 몇 권의 책으로 쓴 것은 실로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베트남전쟁을 가장 오래, 힘겹게 치른 이들 중 한 명이었을 로버트 팀버그가 9월 6일 별세했다. 향년 76세.

로버트 팀버그는 1940년 6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 마이애미비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Rosemarie Sinnot)는 브로드웨이의 거물 프로듀스 플로렌즈 지그펠트(Florenz Ziegfeld, 1867~1932)의 인기 쇼 ‘지그펠트 폴리스’등의 코러스 출신으로 ‘맥칼 McCall’s’같은 잡지 표지에 등장한 적이 있는 무용수였다. ‘지그펠트 걸’로 불리던 1920, 30년대의 ‘지그펠트 걸’은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와 맞먹을 만한 인기 연예인이었지만, 어머니는 ‘그들 중 한 명(one of them)’으로 불리는 걸 싫어할 만큼 “약간 뻐기던” 자의식 강한 사람이었다. 아버지(Samuel Timberg)는 플라이셔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뽀빠이’ ‘베티 붑’ ‘유령 캐스퍼’ 등의 배경음악 작업에 참여한 보드빌 작곡가였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너무 소극적이고 소심해서, 적어도 팀버그가 보기에는 능력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고 어머니의 알코올 중독에도 제대로 개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부모가 이혼한 뒤 어머니와 함께 산 팀버그는 아버지 같은 사람은 되기 싫었다고,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고, 2014년 npr 인터뷰에서 말했다. 거친 운동을 찾아 하면서 고교시절부터 ‘린베츠(Lynvets)’라는 지역 아마추어 풋볼팀에서 러닝백으로 뛴 것도, 세인트존스대를 1년 만에 자퇴하고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한 것도, 64년 임관과 함께 해군이 아닌 해병을 그것도 가장 거칠다는 보병장교를 택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는 1966년, 그러니까 린든 존슨의 민주당 정부가 인도차이나반도에 병력과 화력을 마구 퍼붓던 시기의 기세 등등한 해병 장교로 베트남 전선에 파병됐다. 그리고 교대 귀국일자를 13일 남겨두고 있던 이듬해 1월 18일, 해병 수륙양용 장갑차 앰트랙을 타고 임무(중대원 급여를 나눠주러 가던 길이었는데, 훗날 대다수 언론들은 정찰 업무라 ‘미화’했고, 그는 한사코 바로잡으려 했다)에 나섰다가 저 변을 당했다. 장갑차 하부는 지뢰에 취약했고, 당시 차량에는 465갤런의 가솔린이 실려 있었다. 소대원들은 경상을 입었지만 그는 화염에 휩싸인 채 튕겨 나갔다. 그는 “허리케인에 휩쓸려 몸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나를 들어올린 게 비바람이 아니라 화염이란 게 다른 점이었다”고 훗날 자서전에 썼다(W.P, 2016.9.7)

베트남 다낭 미군병원으로, 필리핀 기지와 일본을 거쳐 본국으로 후송되는 동안 그는 응급실과 수술실에 살다시피 했고, 의료진 실수로 마취 없이 눈꺼풀 재건수술을 받아 또 한번 죽다가 살아난 적도 있었다. 의료진들은 3인칭 ‘더 번(The Burn)’이라 부르던 이가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더라는 이야기, 붕대를 풀고 처음 본 얼굴이 짐작했던 것보다는 양호하더라는 이야기, 눈과 코와 입에 옛 흔적이 남아 있어 새 살이 차오르면 예전처럼 미남이란 소리는 못 들어도 봐줄 만은 하려니 기대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흉터가 표피와 근육을 점점 당겨 얼굴을 더 엉클어뜨려놓는 탓에 상처가 아물기 무섭게 거듭 재건ㆍ성형수술을 받아야 했다는 이야기, 술로 실의와 분노를 달래기도 했다는 이야기…. 그가 자신의 사연과 당시 심정을 온전히 털어놓은 건 은퇴 직전이던 2004년의 자서전 ‘Blue Eyed Boy’에서였다.

-잔디밭의 그들은 위선자
“목숨 걸고 반전운동 했다면
전쟁은 더 일찍 끝났을 것”
살인자 시선에 분노하기도

그에게는 갓 결혼한 아내(Janie Benson)가 있었다. 의사들이 더 이상 해줄 게 없고 그도 사회에서 뭘 해야 할지 막막하던 무렵, 아내가 권한 게 기자였다. “제니에게 농담하냐고 했더니 제 연애편지들이 근사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라고요.” 그렇게 스탠퍼드대학원에 진학했고, 졸업 후 해사가 있는 애너폴리스의 일간지 ‘The Evening Capital’의 기자가 됐다. 낯선 이들과 얼굴 맞대고 대화하는 게 싫어 대학 인터뷰 과제를 작문해서 제출하곤 했고, 거리에서 마주친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조차 못 견뎌 아이 부모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곤 하던 때였다. 그의 울화는 대학 캠퍼스에서 더 커졌을지 모른다. 베트남 전쟁을 살인 잔치라 부르며 징집을 거부한 채 “잔디밭에 모여 프리스비(원반)를 던지며 놀던 또래들”의 시선. 팀버그는 그가 목숨 걸고 싸운 것처럼, 전쟁을 불의라 여기는 이들도 목숨 걸고 반전운동을 펼쳤어야 한다고, 그랬다면 그 전쟁이 좀 더 일찍 끝났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잔디밭의 그들을 비겁자나 위선자라 여겼고, 그들은 팀버그를 가련한 멍청이, 혹은 아이와 양민의 학살자로 여겼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베트남전쟁을 두고 상반된 관점과 경험으로 나뉜 그들 ‘세대의 단층선(generational fault line)’은 전쟁이 끝난 뒤로도 오랫동안 각자의 논리 속에 벌어지고 깊어져 은밀한 적개심과 죄의식으로 그들 세대를 괴롭혔다. 1996년 미해군위원회가 주최한 한 포럼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징집에 응해 전선에 나선 이들과 그러지 않은 이들 사이의 갈등은 ‘소화되지 않은 고깃덩어리(indigestible lump)’처럼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징집에 불응한) 여러분들이 우리보다 똑똑하고 예민하고 훨씬 도덕적으로 우월한 차원에 산다고 생각한다는 걸 안다. 그리고 어쩌면 살아가야 할 더 큰 명분을 당신들이 지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usni.org, 2016.9.8)

1968년 스탠퍼드대 학생들의 반전 시위 장면. 피켓에는 '전쟁에 순응하는 자는 살인자와 공범'이라는 내용의 적혀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살인자의 낙인을 얼굴에 달고 살던 팀버그도 저 시위를 지켜봤을지 모른다. 캘리포니아 온라인 아카이브(oac.cdlib.org)에서.

기자가 된 지 이틀째 되던 날, 그는 투신자살 사건 취재를 맡아 현장에 투입된다. 경찰과 목격자들을 상대로 분주히 사건정황을 취재하며 그는 “(마감 시간과 책임감에 떠밀려) 그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고, “거기선 내가 ‘희생자’가 아니더라”고 말했다. 그는 그 긴장이 반가웠고, 거기서 옛 투지를 길어 올렸다. 3년 뒤 ‘Boltimore Evening Sun’으로, 79년 니먼 펠로십(Nieman Fellowship)을 받아 하버드에서 연수한 뒤 81년 ‘Evening Sun’의 자매지 ‘The Sun’으로 옮겨 백악관을 출입했다. 만년의 그는 워싱턴 지국장을 겸했다. 기자로서 그는 자신과 사회를 조금은 멀찍이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여유를 얻기도 했을 것이다.

-기자가 되어 전쟁을 쓰다
참전영웅 매케인 전기 집필
美 흔든 이란콘트라 스캔들
베트남전 시각으로 서술 명성

70년대 초는 말라이 학살(My Lai, 68년 3월 미 육군이 남베트남 말라이 마을 민간인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 사건 재판이 핫이슈였다. 볼티모어 선 기자였던 아놀드 이삭(Armold Issacs)은 “재판이 끝난 뒤 팀버그는 그 사건이 왜 단순한 사고나 전쟁의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잔혹한 범죄인지에 대한 놀라운 칼럼을 썼다”고 말했고, 이브닝캐피털 동료 할 버데트(Hal Burdette)라는 이도 “당시 베트남전쟁에 관한 그의 기사들은 특히 무척 신중하고 극도로 객관적이었다”(capitalgazette.com)고 평했다.

1986년 터진 레이건 정부의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미국 정부가 적국 이란에 은밀히 무기를 팔아 그 돈으로 니카라과 좌파 정부에 대항한 콘트라반군을 지원한 초대형 사건이었다. 었다. 해병 중령 올리버 노스(Oliver North)와 전 백악관 안보자문관 존 포인덱스터, 로버트 맥팔레인 등이 핵심 인물로 기소됐고, 그들은 모두 팀버그와 함께 해사를 다녔거나 해병 전우로 베트남전에서 함께 싸운 이들이었다. 팀버그는 약 10년 뒤 첫 책 ‘Nightingale’s Song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출간하며 “베트남전 베테랑으로서 귀국한 뒤, 침 세례를 받고, 살인자로 손가락질 당하고, 얼간이(saps)로 조롱 당한 이들을 위해 썼다”고 말했다.(NYT, 2014.8.29) 그는 책에서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드리운 베트남전쟁의 그늘을 찾았다. 전쟁에서 지고 윤리적 심판에서도 패배한 군인들, 특히 해병 엘리트들의 응어리와 굴절된 명예욕이 레이건이 부른 ‘나이팅게일의 노래(부활과 불멸의 노래)’에 휘둘렸으리라는 것. 그는 “사람들은 거기서 탐욕과 날것의 야망, 권력 남용, 의회와 연방정부에 대한 모욕을 보았지만, 나는 익숙하고도 곤혹스러운 냄새들, 화약과 화염, 병원의 소독약 냄새를 함께 맡았다. 그 사건은 베트남 전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고 말했고(WP, 위 기사), “그들은 비밀의 공유자들이었다. 애너폴리스(해사)와 베트남전 전우로서, 또 전후 세대에 드리운 그늘의 공유자로서, 그들은 어떤 확신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을 믿었다”고 썼다.(boltimoresun.com)

하지만 저 책의 진짜 주인공은 베트남의 해병이자 포로였던 공화당 전 상원의원 존 매케인(1930~)과 해군장관을 지낸 민주당 전 상원의원 제임스 웹(1946~)이었다. 팀버그는, 이념은 사뭇 달랐지만 정치인으로서 성공한 그들에게서 군인의 어떤 모범을 찾고자 했다. 책은 특히 매케인의 전쟁영웅으로서의 면모를 부각, 매케인이 훗날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그는 2007년 ‘한 미국인의 오딧세이’라는 부제를 단 매케인의 평전도 썼다.) 그의 책은 호평을 받았고 뉴욕타임스도 ‘올해의 주목할 만한 책’으로 선정했지만, 서평에서는 “팀버그는 베트남전 패배와 군인들의 배신감을 극화하고자 했다”고 살짝 흘겼다. (NYT, 2016.9.12)

2004년의 책 ‘Blue Eyed Boy’는 팀버그 자신의 이야기였다. 참전과 부상, 시민사회로 편입하기 위해 벌였던 전쟁 같은 분투와 동요하던 신념, 자신의 얼굴을 긍정하기까지의 이야기. 그는 “목숨 건 도전도 불사하던 군인정신, 그 정신을 지탱하게 해주던 전우애 같은 것들이 사라지고 결국 혼자가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우리는 전쟁과 그 전쟁이 바꿔놓은 자신을 감당하며 삶의 차가운 전망 앞에 마주서야 한다”(NYT, 2014년 기사)고 썼다. 뉴욕타임스는 “생존- 투쟁- 보상의 ‘오프라 윈프리 풍’의 클리셰도 없고, 신앙의 힘으로 시련을 극복했다는 투의 초월적 투항도 없다”고 호평했다. 다른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선한 의도로 나섰다가 불운을 겪은 세대와, 전쟁에 나서 싸우고 또 싸우지 않은 청년들이 그 전쟁으로 인해 서로 불화하는 나라를 위해 이 책을 썼다”(theamericanconservative.com)고 말했다. 평생 베트남전 베테랑이나 망가진 얼굴(disfigurement)로 규정 당하길 거부했던 그였지만, 마침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어 저 불화하는 세대의 단층을 메워보고자 했던 거였다. 그는 그렇게 냉소나 자기연민 없이, 작전에 임하는 해병장교의 용기와 투지와 책임감으로, 전쟁이 끝나고 30년이나 지난 뒤에야, 전쟁과 그 이후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로 자신의 얼굴을 과감히 던져놓을 수 있었다.

그는 “누가 (내 이야기에) 관심이나 있을까? 어쩌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특히 국가를 이끄는 책임을 진 이들은, 끊임없는 자기연민과 알량한 명성에 취한 공허한 자기도취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나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역경에 직면해 발휘한 인내와 의지는 푸대접 받고 희생자의식과 자기연민은 찬사를 받는 사회에서는, 선을 위한 커다란 헌신과 희생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참전세대의 희생에 대한 그의 변호는, 섣불리 찬반을 말할 수 없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해군 조종사였던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 세대의 사연을 책(‘The Magical Stranger’s’)으로 쓴 적이 있는 저널리스트 스티븐 로드릭(Stephen Rodrick)은 말년의 그를 인터뷰한 뒤 “정치적으로 팀버그는 그가 쓴 책 속의 인물들보다 훨씬 자유주의자였다”고, “도널드 트럼프의 생각들에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곤 했다”고 전했다.(The Slate.com, 16.9.12)

팀버그는 책에서 자신을 절망에서 구원한 아내 제니를 배신해 이혼에 이르게 된 사연 등을 고백했고, npr 인터뷰에서 “이제 제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모두 제니의 용서 덕”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제니와 3남매를 두었고, 이혼으로 끝난 두 번째 결혼에서 아들을 낳았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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