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쯤 되었을까. 길을 한참 헤매다 집에 돌아왔다. 애타게 기다렸을 아빠는 오히려 공부 많이 하고 왔다며 어깨를 다독여 주셨다. 그리고 더 튼튼한 운동화를 사주셨다. 그날 이후 나비가 꽃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골목을 기웃거리며 신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컬러TV가 귀하던 시절, 아빠는 당시의 얼리어댑터였다. 소니에서 새 워크맨을 출시하면 냉큼 집으로 들여왔다. 아빠가 쓰던 구형 워크맨은 큰 오빠에게 내려가고, 그다음 작은 오빠를 거쳐 한참 후에 내 손에 쥐어졌다. 워크맨만큼이나 아빠를 사로잡은 것은 텐트였다. 새 텐트 광고가 신문에 나면, 신문광고를 오려 호주머니에 넣어서 다녔다.

길 위에서 항상 행복해하던 아빠

호기심으로 꽉 찬 아빠가 여행을 좋아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신문에 나오는 맛집과 여행기사를 오려 스크랩하는 것은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지도를 펼쳐놓고 여행계획표를 만들 때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곤 했다. 한문과 아라비아 숫자로 가득 찬 계획표라 어린 막내딸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빠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웠다.

아빠와 첫 해외여행은 캄보디아였다. 앙코르와트가 보고 싶다고 했다. 날씨는 왜 이리 덥고 길은 왜 이리 험한지. 혼자 갔을 때는 아무 문제 되지 않던 험한 날씨와 거친 환경이 야속하기만 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비포장길을 8시간이나 달려야 했다. 그래도 여행을 준비한 딸이 속상해할까 봐 단 한 번도 불편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2010년에는 함께 스위스를 여행했다. 엄마가 고등학교 때 본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오스트리아에서 더 많이 촬영했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우리는 스위스로 향했고, 나는 여행 중 가장 무거운 가방을 들어야 했다. 홍삼을 가득 넣어갔기 때문이다. 매일 저녁 홍삼을 드리고 두 분 건강을 체크하는 것이 나의 큰 임무였다. 그러다 첫날 아빠의 트렁크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작은 트렁크 안에 모양과 색이 다른 모자가 다섯 개나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아빠를 쳐다보니 “그때그때 맞춰서 쓸 거야”라며 멋쩍은 미소를 지으셨다. 아빠 나이 여든. 여전히 못 말리는 멋쟁이셨다.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여행을 즐기고 있는 아빠

멋쟁이 아빠에게도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한쪽 폐다. 젊어서 앓은 결핵 때문에 평생 술 한 잔 담배 한 모금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아빠가 가끔 장롱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만지작거리시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다. 나이가 들어야 알았다. 그것을 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빠의 폐는 산을 좋아하면서도 오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스위스는 괜찮을 거라고 안심을 시켜드렸다. 기차가 바로 앞까지 모셔다드리고, 금방 내려올 거니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딸내미의 착각이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고 전망대에 도착해서는 산소호흡기를 찾았다. 이렇게나 힘들어하실 줄이야. 결국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아빠는 입원했고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융프라우에 오르는 기차 안. 출발할 때만 해도 산소호흡기를 달라고 하실지 생각 못 했다.

아빠의 치매를 발견한 것도 여행길이었다. 2012년 추석 우리 가족은 일본 규슈(九州)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비가 왔지만 문제없었다. 가족이 함께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아빠가 이상했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가끔 ‘여기가 어디냐’라고 물었다. 사진을 찍을 때는 환하게 웃고 계셨지만, 자주 기억을 놓쳤다. 비가 내리던 구로가와(黑川)의 밤, 참 많이도 울었다.

길 위에서 항상 행복해하시던 아빠

매일 기온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던 올해 여름. 아빠와 담양으로 나들이를 갔다. 반짝이는 초록 아래 산책하는 이들을 보며 “정말 신기해. 손바닥만 한 크기에 사람들 얼굴이 저렇게 다 다르다니. 조물주의 능력은 놀라워.”라고 하셨다. 우리는 시원하게 온천을 즐기고 천천히 근처를 걸었다. 맛이 변했다고 불평하시면서도 발길을 끊지 못하는 덕인관에 가서 떡갈비도 맛있게 드셨다. 7월의 담양은 화려했다. 백일홍은 세상에 꽃분홍색밖에 없는 것처럼 뽐내며 만발해 있었다. 백일홍을 보며 우리는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만 해도 담양 여행이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지도를 두고 여행계획을 짜고 계신 부모님

아빠가 가신 지 열흘이 지났다. “내면의 부모를 떠나 보내는 일은 마음의 지진이나 산불과 같다”고 말한 김형경 작가의 말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제주 맛집을 알아뒀으니 가을에 꼭 제주에 가자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올해 단풍은 더욱 아름다울 거라며 내장산에 다시 가기로 했는데, 봄에는 대만에도 같이 가자고 했는데. 아직 함께할 여행이 이리 많이 남아있는데, 약속도 안 지키고 먼저 가시다니. 여행을 돌아보니, 아빠와 함께 여행한 순간들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아니었나 싶다.

아빠, 산소호흡기 떼고 에베레스트도 킬리만자로도 함께 가요. 이제 어디든 나비처럼 날아, 아빠가 가보고 싶던 세상 구석구석 여행해 보아요.

채지형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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