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ㆍ죄책감을 느끼지만 기쁨을 주는 것)

매일 오후 3시 30분,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다가올 즈음이면 나는 고민에 빠진다. ‘아, 오늘은 아이와 무얼 하고 놀아 준담.’ 어린이집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전력 질주하는 아들과 함께 안전하게 놀 만한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우레탄이 문제 된 후로 동네 놀이터는 꺼려지고 집 근처 도서관에서는 아들이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 산책길을 서성거리다가 아이를 겨우 달래서 집으로 들어오면 그 순간부터 시간이 참 더디게 간다. 집 안에 있는 장난감은 싫증 나고 같이 놀 친구도 없으니 아이가 엄마인 나에게만 매달리는 탓이다. 꼼짝 않고 아이 옆에 붙어 앉아 놀이 상대를 해줘야 한다. 잠시 한눈을 팔거나 성의 없게 상대하면 금세 알아차리고 보채면서 더 강한 호응과 새로운 놀이를 요구하니 이보다 까다로운 고객도 없다. 화장실 가는 일조차 쉽지 않아서 집 안에서의 놀이도 만만치 않다.

그러다 보니 늘 먼저 생각나는 곳이 키즈카페다. 나름대로 안전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니 아이가 어디를 가도 마음이 느긋하고 한 장난감에 질릴 때면 다른 장난감이 눈에 띄니 떼를 쓰는 경우도 거의 없다. 슬그머니 엄마와 아이가 분리되어 ‘너는 너, 나는 나’의 상황이 만들어진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 늘 온몸의 안테나를 아이를 향한 채 켜놓아야 하는데 이곳에서라면 잠시 스위치를 꺼 둘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키즈카페 안에서 나는 관찰자가 된다. 아이 곁을 쫓아다니며 상황은 관찰하지만 개입은 하지 않는다. 굳이 나서야 할 상황만 아니라면 가만히 휴식을 취하는 편이다. 때때로 스마트폰도 흘긋거리고 잠시 차 한 잔의 여유도 즐긴다. 주위에 있는 다른 부모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로 나처럼 관찰자로 있거나 아예 방관자처럼 아이와 멀찍이 떨어져 책을 읽는 부모도 있다. 이 경우는 적어도 아이가 다섯살 이상은 돼야 가능하다. 물론 아이의 놀이에 적극 개입하며 함께 놀아주고 놀이를 제안하는 부모도 더러 있다. 곁에서 보면 참 존경스러운데 결코 많은 비중은 아니다. 이처럼 키즈카페 에서 부모들의 행동유형은 관찰형, 방관형, 참여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부분 부모들은 주로 관찰형과 방관형에 속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키즈카페에 다녀올 때면 마음이 불편하다. 엄마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기분도 들고 어쩐지 아이도 허울뿐인 놀이를 하고 온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을 떨칠 수는 없다. 달리 갈 만한 곳도 없거니와 숨통이 트이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섯살 때 집 앞에서 혼자 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운이 좋아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게 어떻게 그렇게 어린아이가 보호자도 없이 아파트 앞에서 혼자 놀았을까, 하는 부분이다. 엄마에게 따져 물으니 당시에는 그런 상황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고 항변하신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많은 아이가 아파트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놀았다. 부모들은 집에 있다 식사 때가 되면 아이를 데려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키웠다는 말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지역 사회가 아이를 함께 지켜봐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비용을 내가면서 굳이 놀이 공간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아이를 마음 편히 놀게 해 줄 곳이 없다. 아이만 혼자 놀게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거니와 부모와 함께 있다 해도 다들 내 아이 외에 다른 아이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이지는 못한다. 그런 상황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사회가 변하면서 육아의 환경이 변했고 그러다 보니 엄마들이 키즈카페를 찾게 된다는 말이다. 항상 아이를 향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니 키즈카페 안에서만큼은 조금 게을러져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 잠시 관찰자로, 방관자로 지내는 그 시간을 주변에서 비난하지도 스스로 책망하지도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정미 전업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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