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빈부격차
겉만 반짝, 속은 곪은 ‘금박 시대’ 막으려면
경제불평등 줄일 ‘한국적 대압착’ 시급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간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구절이다. 미국 대공황기에 농촌에서 도시로 밀려 나온 이들의 빈곤과 생존 투쟁을 다룬 소설이다. 잊고 있던 이 구절을 다시 기억하게 한 이는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다. 심 대표는 정기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불평등 해소를 위한 ‘대압착 3대 플랜’을 제안했다. 대압착은 대공황을 떠올리게 했고, 다시 ‘분노의 포도’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기억 이편으로 불러내게 했다.

대압착이란 개념을 학문적으로 주조한 이들은 경제사가 클라우디아 골딘과 로버트 마고였다. 2007년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미래를 말하다’(원제는 ‘진보주의자의 양심’)에서 적극 강조해 더욱 유명해졌다. 대압착(Great Compression)은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빗대 개념화한 것이다. 1929년 대공황 이후 1960년대까지 미국에서 진행된 부유층과 노동계급 간의, 노동계급 안의 소득 격차가 크게 줄어든 현상을 지칭한다. 전후 미국사회가 중산층이 두꺼운 국가가 된 것은 대압착의 결과였다. 대압착 시대는 강력한 조세ㆍ복지정책을 바탕으로 불평등을 해소한 뉴딜 시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대압착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등장하면서 불평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크루그먼은 1980년대 이후 미국사회를 두 번째 ‘금박 시대(Gilded Age)’로 본다. 금박 시대란 마크 트웨인과 찰스 워너가 함께 쓴 소설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곪아 있는 시기라는 의미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동시에 탐욕스런 자본가들과 부패한 정치가들이 득세했다. 고도성장이라는 화려한 표층 아래 빈부격차라는 어두운 심층이 결합해 있던 시대가 금박 시대였다. 한 자료에 따르면, 1896년 상위 1%가 미국 국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한 반면, 하위 44%는 단지 1.2%만 소유하고 있었다.

미국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는 다르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무기력, 사회적 갈등 분출을 지켜볼 때 최근 우리 사회는 금박 시대라는 은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소수 상층의 삶은 미국 금박 시대의 신흥 대부호들처럼 더 없는 풍요를 누리지만, 다수 하층의 삶은 ‘분노의 포도’의 주인공들처럼 갈수록 고착화하는 빈부격차로 인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 발표한 불평등 지표는 우리 사회 빈부격차를 생생히 증거한다. 1990년 7.8%였던 상대빈곤율이 2013년 14.5%로 늘어난 소득 불평등, 2014년 비정규직의 임금이 정규직의 49.9%에 불과한 일자리 불평등, 2013년 65세 이상의 상대적 빈곤율이 48.1%를 기록한 노인 불평등 등의 지표들은 우리 사회가 ‘한국적 금박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갖게 한다. ‘헬조선’은 과장된 어법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한국적 금박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우울한 전주곡일지 모른다.

불평등 해소를 위한 3대 대압착 플랜으로 심상정 대표가 제시한 것은 최고ㆍ최저임금 연동제, 초과이익 공유제, 아동ㆍ청년ㆍ노인 기본소득제다. 우리 경제와 사회 현실을 고려할 때 이 플랜들이 어느 정도까지 실현 가능할지, 그리고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한 것은 노동시장이든, 대기업ㆍ중소기업 간이든, 일상생활 영역이든 경제ㆍ사회적 격차들을 이대로 놓아둘 순 없다는 점이다.

2017년 대선 국면이 열리기 시작한다. 보수 정치세력과 진보 정치세력 모두 불평등과 격차 해소를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제시하고 있다. ‘미래를 말하다’에서 크루그먼이 던지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문제의 출발은 경제이지만, 문제의 해결은 정치라는 것이다. 한국적 대압착 정책의 정치적 공론화를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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