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톡2030] 메시지 티셔츠 사회참여

“소녀는 왕자가 필요 없다”

“리멤버 416” 등 옷에 새겨

어디든 입고 다니며 드러내

패션에 보람 더해 빠르게 확산

수익금은 대개 사회운동에 쓰여

위안부 돕고 태극기마을 조성도

‘직접 나서지 않는 죄책감 덜기’

‘의식 있는 사람 과시용’ 비판엔

“실천에도 단계가 있는 것” 옹호

'페미니스트 티셔츠' 구매자 이상훈(가명)씨가 티셔츠를 입고 서울의 한 공원에서 셀카를 찍고 있다. 이상훈씨 제공

대학원생 김현지(23ㆍ가명)씨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지난 6월에 구입한 ‘Girls Do Not Need A Prince(소녀들에겐 왕자가 필요 없다)’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는다. 평소 자신의 생각과 같고, 연분홍색 디자인도 예쁘기 때문이다. 티셔츠를 입고 나가면 시선이 집중되지만 김씨는 신경 쓰지 않는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게 메시지 티셔츠의 장점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길에서 같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보면 동지를 만난 것 같아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며 “메시지 티셔츠를 입는 건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이 있고, 계속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다짐하는 일종의 제스처”라고 설명했다.

2030세대는 말하기 위해 입는다. 자신의 생각과 방향이 같은 사회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티셔츠 한 장이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 걸치고 다니다 누군가가 티셔츠에 쓰인 메시지를 읽고 잠깐이라도 걸음을 멈춘다면 그날은 성공이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세월호 기억티셔츠’ 등이 제작되면서 메시지 티셔츠는 청년들에게 가장 친숙한 사회적 발언 도구가 됐다. 지난 6월 페미니즘 커뮤니티 메갈리아가 자신들의 계정을 삭제한 페이스북 코리아에 반발하며 민사소송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페미니즘 티셔츠’는 무려 4,000여명으로부터 후원금 1억 3,000만원을 거둬 폭발적 인기를 실감케 했다.

소비와 사회 참여,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2030세대가 말하는 메시지 티셔츠의 장점은 단순한 소비가 아닌 기부를 통한 사회참여다. 특정 이슈에 대한 티셔츠를 구매하면 그 돈은 관련된 사회적 프로젝트에 쓰이기 때문이다. 대학원생 최은지(25ㆍ여)씨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돕는 일에 옷값 절반을 기부하는 ‘마리몬드 티셔츠’를 구매했다. 기왕 옷을 산다면 그 돈이 의미 있는 일에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승태(26)씨 등 청년 3명이 만든 알토이고(ALTOEGOㆍ높은 자아라는 뜻)팀은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유관순 열사ㆍ윤봉길 의사 등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판매한다. 판매수익으로 을사늑약 항거 의병운동이 일어난 충남 당진에 태극기벽화마을을 조성할 예정이다. 민씨는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새겨진 메시지 티셔츠를 입으면 기부자들도 매일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상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라는 티셔츠를 제작한 아사퍼슨(26ㆍ가명ㆍ여)씨는 “티셔츠는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도구”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을 억압하는 사회분위기가 있지만 매일 티셔츠를 입으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생 김지훈(24)씨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에 찬성하는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 ‘We need THAAD for our security(우리는 안보를 위해 사드가 필요합니다)’라고 쓰인 티셔츠를 디자인할 계획이다. 그는 “전쟁광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도 사드 배치에 찬성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티셔츠를 입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메시지 티셔츠 문화는 사회참여방식의 다변화를 보여준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1980~90년대 청년들의 사회참여 방식이 직접 짱돌을 들고 특정 장소에 가서 시위하는 것이었다면 요즘 청년들은 트위터ㆍ페이스북부터 티셔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메시지를 던지는 ‘일상적 저항’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알토이고(ALTOEGO)팀은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등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제작해 판매한 수익으로 을사늑약 항거 의병이 일어난 충남 당진에 태극기벽화마을을 조성할 예정이다. 알토이고 제공
일상적 저항 VS 느슨한 참여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티셔츠 제작자 아사퍼슨씨는 "누구나 티셔츠를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작은 사이즈의 로고를 제작했다"고 말했다. 아사퍼슨 제공

주장하는 바를 강한 구호로 표현하지 않는 것도 메시지 티셔츠의 특징이다. 예컨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제기하는 ‘언제 어디서나 수요시위 티셔츠’에는 ‘Peace my wish for the girl’이라는, 언뜻 봐서는 뜻을 명확히 알 수 없는 글귀가 쓰여져 있다. 메시지 티셔츠를 입는 젊은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입고 다닐 수 있는, 일상의 참여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아사퍼슨씨 역시 티셔츠에 들어가는 로고를 3㎝ 정도 크기로 작게 디자인했다. 그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크게 새기고 다니는 게 아직 부담스러운 사람도 많을 것”이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작은 로고를 택했다”고 말했다.

이런 디자인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소셜아티스트그룹인 로고스 디멘션팀은 전ㆍ현직 대통령의 실루엣과 재임 당시의 폭정ㆍ실정 사진을 합성한 ‘매일매일 시위 티셔츠’를 제작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실루엣에 5ㆍ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 모습을 합성하는 식이다. 대표 오현석(31)씨는 “2014년에 정부비판 그림을 벽에 붙였다고 팝아트 작가 이하씨에게 벌금이 부과되고 지난해엔 세월호 참사 추모집회에서 노란 깃발을 들고 퍼포먼스를 벌인 소셜아티스트 홍승희씨도 교통방해죄로 벌금을 내야 했다”며 “아무리 정부가 억압하려 해도 표현의 자유는 막을 순 없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이런 형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실루엣에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을 합성한 ‘매일매일 시위 티셔츠’. 로고스 디멘션 제공

강한 메시지를 피하는 태도는 일종의 자기검열이라는 풀이도 있다. 대학생 장우혁(25)씨는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많이 보는데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대중을 가르치려는 것 같아 거리감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페미니스트 티셔츠를 구매한 조영진(23ㆍ가명)씨도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 비난을 받을까 봐 아직까지 직접 입고 다니진 못했다”고 말했다. ‘매일매일 시위 티셔츠’를 디자인한 오씨도 “주변에서 ‘(표현이) 너무 과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는 이를 ‘기업 사회공헌식 참여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환경파괴나 비윤리적 경영활동을 숨기는 기업들처럼, 사회참여를 가장한 소비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티셔츠에 기부하는 행위를 통해 ‘사회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하면서 ‘나는 의식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과시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메시지 티셔츠가 “사회적 구조나 금기에 저항하지 않는 느슨한 참여”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 티셔츠 제작자들과 구매자들은 느슨한 참여도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다’고 강조한다. 아사퍼슨씨는 “소극적 실천도 하나의 실천이고, 실천에도 단계가 있다”며 “자기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는 다양한 참여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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