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조세핀 델 디오

조세핀 델 디오는 개발 자본에 맞서 예술가와 동성애자들의 해방구 또는 낙원으로 불려온 미국 메사추세츠 주 프로빈스타운의 자연과 문화를 지켜온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오늘의 프로빈스타운이 그의 바람처럼 예전 같지는 않지만, 오래된 건물과 습지와 황량한 모래언덕이 남아있게 된 데는 그를 비롯한 토박이들의 공이 컸다. 남편 살바토레가 1980년 촬영한 사진. provincetownarts.org에서.
청교도 이민의 시작점, P타운

1620년 메이플라워호 닻 내린

메사추세츠주 프로빈스타운

이민자 전파의 전초기지 역할

아웃사이더의 해방구로 변신

척박한 환경에 주민들 떠나고

도시에서 밀려난 예술인 정착

동성애자 많아 ‘퀴어타운’ 별칭

마을 보존의 주역, 델 디오

1950년대 개발 붐 번져 오자

국립공원화 앞장… 관철시켜

주민委, 기념일 제정해 기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비숍에서 열린 6번 도로(U.S Route 6)가 구불구불 대륙 16개 주를 가로지른 뒤 대서양을 만나 멎는 곳이 메사추세츠 주 케이프 코드(Cape Cod)다. 멀리서 달려온 길의 관성에 밀리듯 툭 불거져 낚싯바늘처럼 휘어진 그 곶(串)의 끝, 미늘 자리 땅끝에 프로빈스타운(Provincetown)이 있다. 조수가 들고나는 해안 습지(20㎢)를 다 쳐도 45㎢에 불과하고 마른 땅의 태반도 모래와 숲이 먼저 차지해버린, 상주 인구 약 3,000명의 작은 마을. 100여 년 동안 예술가들의 해방구로, 또 ‘유에스에이 퀴어스빌(Queersville U.S.A)’ ‘동성애자들의 낙원’으로 불려온 곳이다.

1950, 60년대 미국의 부동산자본에 맞서 그 마을의 바다와 습지와 사구와 숲과 오래된 건물들을, 그 황량한 땅끝에 깃들인 이들의 일상을 지켜내는 데 힘을 보탠 작가 겸 향토사학자 조세핀 델 디오(Josephine Del Deo)가 8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90세.(NYT, 2016.8.26) 이번 ‘당신’의 주인공은 그와 그의 이웃들, 그리고 시절에 떠밀려온 그들의 공간 프로빈스타운이다.

1620년 대서양을 건넌 메이플라워 호가 닻을 내린 곳이 지금의 프로빈스타운(이하 P타운) 맥밀란 부두(MacMillan Pier)였다. 필그림 파더스들이 건국이념의 기초가 된 ‘메이플라워 협약(Mayflower Compact)’을 맺은 곳, 긴 항해의 희생자들과 처음 태어난 아이들의 태를 묻은 곳이 거기였다. 뒤이어 대양을 건너온 이들이 플리머스로 보스턴으로 뉴욕으로…, 더 멀리 서부로 갓 부화한 거미 떼처럼 퍼져 첫 도시들의 터를 닦던 세월 동안 P타운은 고래를 잡아 기름을 대던 발전기지였고, 대구와 농어 전갱이 따위를 염장해 나르던 식량기지였다. 그러니 P타운은, 6번 도로의 종점이 아니라 기점이고, 거창하게 말하자면 미국 앵글로색슨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하지만, ‘세월(The Hours)’의 작가 마이클 커닝햄이 쓴 P타운 찬가의 제목이 ‘아웃사이더 예찬’(조동섭 옮김, 마음산책)이고 원제가 ‘Land’s End’이듯, 그곳은 아웃사이더들이 차별적 자의식을 투영해온, 퇴각의 땅끝이었다. 먹을 물도 농사지을 흙도 없어 최초의 개척자들은 첫 해 겨울을 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고, 1654년 플리머스 식민지 정부는 어업 전진기지로 눈독을 들여 인디언 부족으로부터 코트 6벌과 구리주전자 2개, 곡괭이와 도끼와 칼 12자루씩을 주고 그 땅을 사들였다. 이후 약 200년 동안 P타운은 밤 사이 거친 바람에 모래 언덕을 떠다니던 어부들의 움막들이 지키던 푸석한 공유지였고, 허리케인이라도 지나가면 길이 끊겨 섬처럼 고립되곤 했다. 1873년 수산물 운송 철도가 놓였지만 그 무렵 19세기 중반은 석유에 고래기름이 밀리던 때였고, 19세기 말부턴 어업도 시들해졌다. 1898년 11월의 기록적인 폭풍 ‘포틀랜드 게일’ 이후 포르투갈 이주민이 주축이던 어부들마저 하나 둘 마을을 떠났다. 그 빈 마을을 뉴잉글랜드의 예술인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1727년 법으로 주민들의 토지 점유권만 인정했던 주 정부는 섬의 주인이 바뀌기 시작하던 1893년 점유부동산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1910년대 찰스 호손(왼쪽)의 케이프코드미술학교 수업 장면. 그의 학교는 미국 최초 야외 예술학교로 알려져 있다. en.wikipedia.org

미국 인상파 회화의 선구자로 꼽히는 찰스 호손(1872~1930)이 P타운의 햇빛에 반해 1898년‘케이프코드미술학교’를 열었고, 잇달아 4개의 경쟁 학교가 들어섰다. 에드워드 호퍼도 케이프코드 들머리(노스트루로)에 살면서 땅끝을 들락거렸다. 무명의 유진 오닐과 에드먼드 윌슨, 또 적잖은 작가 연극인들이 비싸진 집세에 쫓겨, 마을과 바다의 풍광에 반해 P타운으로 이주했다. 절정은 1차 대전 직후, 전쟁을 피해 프랑스 파리 센강 좌안의 화가들이 뉴욕을 거쳐 몰려 들던 무렵이었다. 그들은 여름 피서철이 되면 크고 작은 전시회를 열었고, 맨해튼의 화상들은 유망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마을을 찾아왔다. 여름 한 철 P타운에 출장 갤러리를 운영하는 곳도 많았다. 연극인들은 ‘프로빈스타운 플레이어스’라는 극단을 만들고, 유진 오닐이 자신의 희곡 ‘카디프를 향하여 동쪽으로’를 직접 연출해 처음 상연한 것은 1916년 여름이었다. P타운의 예술인들은 그 해 여름을 ‘위대한 1916년 여름’이라 부른다.(iamprovincetown.com/history)

뉴욕타임스는 지난 8월, 그 ‘위대한 여름’ 이후 P타운 100년 역사를 일별하는 기사를 썼다.(NYT, 8.11) 커닝햄은 1차대전이 끝난 뒤, 다시 말해 뉴욕의 예술적 위상이 공고해진 뒤부터 P타운의 예술적 명성도 쇠락했다고 썼지만, 그 과정은 아주 완만하게 진행됐던 듯하다. 앤디 워홀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첫 멀티미디어 이벤트 ‘Exploding Plastic Inevitable’을 연 것은 1966년 8월이었다. NYT는 “썩 자연친화적이지 않던 워홀이 P타운을 택한 것은, 뉴욕 예술시장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뉴욕과 P-타운의 끈이 삭아간 건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조세핀 델 디오는 1925년 10월 24일 뉴욕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공예가였고, 아버지는 풍경화가였다. 그는 뉴욕 캔톤 주 성로렌스대학을 나와 필라델피아 템플대 타일러아트스쿨에서 강의했고, 펜실베이니아의 한 극단에서 견습배우로도 일했다. 음악을 전공하고 시를 쓰던 그가 P타운에 들어간 것은 26세이던 51년이었고, 2년 뒤 시인 해리 켐프(Harry Kemp, 1883~1960)의 소개로 만난 화가 살바토레 델 디오(1928~)와 결혼, 그 곳에 정착했다. 부부는 각자의 작업을 하면서 다운타운 서쪽, ‘웨스트 엔드’에 식당을 열어 작업과 생계를 이어갔다.

30년대 대공황 이후 연방정부는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을 통해 적극적인 경기 부양에 나섰다. 50년대 저유가 호황으로 제조업 등 실물 경기가 활기를 띠었고, 부동산 건설ㆍ개발 붐도 뜨거웠다. 그 바람이 P타운에도 번졌다. 건설 자본은 P타운의 동북쪽 해안 광활한 공유지에 대규모 택지를 조성하고 호텔 등 관광ㆍ위락시설 건설하자는 계획을 세워 주 정부와 의회를 설득했다. 개발과 반개발의 대립은 케네디 행정부의 케이프코드 해안국립공원 경계 지정을 둘러싸고 첨예해졌다. 토지를 소유한 토박이 주민들로서는 부동산을 개발하는 게 이익이었겠지만, 그들 중 다수는 보존 즉 국립공원 편입을 선택했다. 훗날 커닝햄이 “지질학적 시간에 따라 살아가면서 그 어디보다도 고요하고 인적 없는 세계”라 썼고, 시인 메리 올리버가 산책과 사색의 “평범한 일상”속에서 ‘완벽한 날들’(민승남 옮김, 마음산책)의 아름다움을 찾던 사구와 갯벌과 석호와 숲, 또 200년 전 데이비드 소로 이래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찬미해온 빛의 세계, 무엇보다 동성애자들과 예술가들이 깃들여 살아온 헐한 집들이 사라지거나 위태로워지는 것을 그들은 원치 않았다.

데이비드 소로 이래 수많은 작가와 화가들이 프로빈스타운 저 모래언덕과 그 너머 해안의 풍경을 사랑해 삶의 자리를 마련해왔다. '타운'이 동성애자들의 낙원이 된 데는 예술인들 다수가 동성애자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1959년 말 주민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화가 로스 모페트(Ross Moffett,1888~1971)와 조세핀 델 디오가 각각 회장과 부회장을 맡았다. 그들의 주장은 딱 하나, 국립공원에 공유지 전부를 포함시키라는 거였다. 델 디오는 훗날 ‘풍경 속의 사람들 Figures in a Landscape’이란 책에 이렇게 썼다. “당시 우리가 추구한 원칙은 지금 관점에서 보자면 비현실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개발을 위한 토지 소유 금지와 투자 이익의 배격이었다.” 1961년 3월 13일 찬반투표에 앞선 주민대책회의에서 델 디오가 행한 연설은 P타운에 대한 뜨거운 애정 고백이기도 했다. 그는 P타운이 처한 현실을 설명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의 반복일 뿐입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될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이 땅을 지금 이대로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내도록 물려주기 위해서, 최종적인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승리했고, P타운의 해안과 숲이 국립공원이 됐다. 델 디오 부부의 앳킨스- 메이요 로드(Atkins Mayo Road)의 숲 속 집과 땅 2만4,000여㎡(7,300여평)도 국립공원의 일부가 됐다.

보존과 생계는 별개였다. 마을은 여름 한 철 관광지가 돼갔고, 작고 개성 있는 갤러리들도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스탠리 쿠니츠, 로버트 마더월 등 남은 작가와 화가들, 지역 주민들은 기금을 모아 버려진 목재 하치장을 사서 ‘예술창작센터 Fine Arts Work Center’를 열었다.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일종의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었다. 1914년 설립된 프로빈스타운미술협회(PAAM)는 연중 전시회와 어린이 청소년 성인 예술교육 프로그램 등을 운영했다.

델 디오 부부의 역할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 특히 조세핀은 저 사업들의 궂은 일을 앞장서 떠맡았다. 그는 버려진 옛 교회를 개조해 76년 프로빈스타운 박물관을 열었고, 거기 지금도 명물로 꼽히는 P타운의 연안 어업용 범선 ‘로즈 도로테아 Rose Dorothea’의 1/2 모형(길이 약 20m)을 주문 제작해 전시했다. 조세핀은 훗날 누가 건물을 헐 생각을 하더라도 배 때문에라도 주저하게 되리라 기대했다고 NYT는 전했다. 박물관은 1999년 폐쇄됐지만, 건물은 공공도서관으로 바뀌어 범선과 함께 지금도 건재하다. 공원지구 내 모래 언덕의 무허가 오두막 철거 명령에 저항하며 그 건물들도 P타운의 역사이고 주거생태계의 중요 자원이라며 공원공단을 설득한 것도 조세핀이었다. 교회와 타운청사, P타운의 등대들은, 사구의 오래된 오두막들과 더불어 2012년 역사보존지구 시설물로 지정됐다. P타운 자치기구인 주민위원회는 2015년 6월 18일을 ‘델 디오 부부의 날’로 선포하며 그들에게 감사패(Seniors of the Year)를 수여했다. 부부의 오랜 친구인 시인 켐프는 조세핀을 “P타운 역사의 뮤즈”라고 부르곤 했다고 한다.(capecodetimes.com, 16.8.25)

프로빈스타운의 모토는 "미국인의 자유가 태어난 곳"이다. 그 자유는 예술과 성지향을 포함한 포괄적 자유를 의미하지만, 인종 차별과 성차별에는 둔감하다는 비판도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현재 P타운 부동산의 3/4은 외지인 소유가 됐다.(NYT) 임대료도 비싸고 연중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도 부족해 여름 한 철 빼면 빈 집들이 즐비하다. 다운타운을 가로지르는 커머셜스트리트를 따라 지금도 약 50여 곳의 갤러리가 있지만, 손님도 주인도 없을 때가 많다고 한다. P타운 미술위원회 관계자(Setphen Borkowski)는 NYT 인터뷰에서 “이건 인내력 테스트 같은 거다. 그 변화는 P타운뿐 아니라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나 그린포인트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1916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월 임대료가 25달러 하던 시절이 다시 올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P타운 특유의 공동체적 감각, 서로 교류하며 공존하는 작가들의 예술 전통은 지속될 것이고, 그건 누구도 설명하기 힘든 이곳만의 연금술 같은 것이다. 그걸 지키기 위해 싸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고 말했다. 그들 중에는 1916년이 아니라 1961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커닝햄은 그들의 연금술을 “힘겹게 싸우고 있는 약소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애국심 같은 애정”이라고 표현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외부인에게 프로빈스타운을 열렬히 변호하며, 불평을 해야 할 때면 자기들끼리만 한다.(…) 자신만의 행동 방식과 존재 방식을 사랑하는 곳들이 으레 그렇듯, 프로빈스타운에서도 처음 세워진 바로 그날부터 줄곧 종말론이 나돌았다.” 거기 누구보다 깊이 감응했을 것 같은 번역가 조동섭은 커닝햄의 뭉클한 낙관을 이렇게 옮겼다. “바다 앞 낡은 집들은, 적어도 제 널빤지들 사이의 틈이 널빤지 자체보다 더 견고한 한은, 계속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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