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을 걷다 (11) 서울 중구 명동(下)

문인 화가 음악가 연극인 가수 등 명동은 문화인의 거리
상점과 음식점 급증하면서 그들의 자취는 대부분 사라져
스테이크, 장어구이, 떡갈비 등 거리 음식 새로운 명물로

지금 서울 명동은 거대한 쇼핑 타운이자 음식 거리다. 명동이 원래 이랬던 것은 아니다. 193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명동은 문화의 거리였다. 문인, 화가, 음악가, 연극인, 언론인 등이 함께 어울려 이야기하고 술 마시며 놀던 곳이다.

●명동에 다방 차린 이상, 다방에서 친해진 김동리와 손소희

서양식 다방과 카페, 주점이 본격적으로 문을 연 1930년대 명동을 즐겨 찾은 예술인으로는 시인 이상, 소설가 염상섭 김동인 김유정, 화가 나혜석 구본웅 등이 있다. 이들 중 이상은 명동에 직접 다방을 차리기도 했다.

'이상의 거리' 표지판. 시인이자 건축가였던 이상은 명동에서 다방을 운영했다.

해방 후 들어선 명동의 다방 가운데 소설가 손소희와 전숙희가 함께 운영한 마돈나가 있었다. 손소희는 단골 김동리와 정이 들어 부부가 됐다. 소설가 이호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동리는 다방에 앉아 손소희에게 소설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명동의 다방 문화는 한국전쟁으로 한때 위기를 맞았으나 곧 되살아났다. “잿더미 위에 남아있는 빌딩에 다방 간판이 붙고 르네상스, 돌체 같은 음악감상전용 살롱이 생겨났어요… 우리는 벽만 앙상하게 남은 남의 집 빈터를 지나 음악감상실을 드나들었어.”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은 명동의 음악다방을 “배고픔의 피난처, 슬픔의 짐을 잠시 맡겨두는 보관소”라고 주간조선에 쓴 적이 있다.

1950년대의 다방 중 문예싸롱과 동방싸롱은 풍경이 대조적이었다. 문예싸롱은 시인 모윤숙 서정주, 소설가 김동리 황순원, 평론가 조연현 등 문단 실세들이 모인 곳이었다. 반면 분방하고 활달한 예술인들은 동방싸롱에 모였다. 동방싸롱은 서른 다섯 살의 청년 실업가 김동근이 1955년 지은 동방문화회관 1층에 있던 살롱이다. 야심만만하던 김동근은 이듬해 밤섬에서 열린 문화인 카니발에 다녀오던 중 배가 뒤집혀 목숨을 잃는다.

●’세월이 가면’ 만들고 세상 떠나간 박인환

이렇게 명동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풍성한 이야기와 달리 지금 명동에는 옛 일을 회상할 공간이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있는 것이 은성주점 표지석과 ‘이상의 길’ 표지판이다. 은성주점은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씨가 1953년에 연 주점이다. 소설가 이봉구와 시인 오상순 변영로 김수영 박인환 천상병, 작곡가 윤용하, 그리고 수필가 전혜린 등이 즐겨 찾았다.

은성주점 표지석. 은성주점은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씨가 운영하던 주점으로 문인, 작곡가 등 예술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박인희의 노래 ‘세월이 가면’이 은성주점에서 탄생했다는 말도 있다. 1956년 어느 날 박인환 일행이 찾아와 외상도 갚지 않은 채 또 술을 달라고 했다. 이명숙씨가 오늘은 외상을 갚아야 술을 내놓겠다고 하자 박인환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펜을 꺼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이렇게 시를 만들자 동석했던 작곡가 이진섭이 곡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래를 만든 곳이 은성주점이 아니라 인근 경상도집이라는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경상도집에서 박인환이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가 부를 노래가 마땅치 않다는 말을 듣고는 즉석에서 시를 쓰고 이진섭이 곡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곡을 잠시 후 합류한 테너 임만섭이 큰 소리로 부르자 거리의 행인들이 몰려 환호했다고 한다.

이봉구가 쓴 ‘명동백작’이라는 책에는 경상도집도 은성주점도 아닌 ‘명동 한 복판 빈대떡 집’이라고 나온다. 누구는 그 집이 경상도집이라 하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월이 가면’은 그 뒤 명동의 상징 노래가 됐지만 박인환은 안타깝게도 노래를 만들고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독특한 건축 양식의 명동예술극장

은성주점 표지석에서 유네스코길을 따라 명동성당 쪽으로 걸으면 명동예술극장이 나온다. 획일적인 직육면체 건물이 즐비한 명동에서 보기 드문 건축 양식이다. 1930년대 중반 서울에 사는 일본인을 위한 위락시설로 지었는데 당시 건물 이름은 명치좌였다. 이후 서울시가 인수해 시 공관으로 썼고 다시 국립극장으로, 금융기관 건물로 사용하다가 2009년 공연전문극장인 명동예술극장으로 재탄생했다.

명동 한복판에 있는 명동예술극장. 일제시대에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위락시설로 지었으나 지금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명동 어디나 그렇지만 이 부근은 늘 북적거린다. 극장 앞에 놓인 의자에서는 사람들이 음료수를 마시거나 담소를 하며 잠시 쉬어간다. 거리 공연도 대개 이 앞에서 한다. 극장 건너편에는 예수 믿으라는 글씨를 잔뜩 써놓은 작은 천막이 설치돼 있다. 근처에서 와이셔츠와 넥타이 차림의 중년 남성이 메가폰으로 예수 믿으라고 열심히 외치고 있으나 사람들은 들은 듯 만 듯 한다.

명동예술극장 앞 의자에서 사람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명동예술극장 앞에 설치된 작은 천막. 예수를 믿으라는 거리 전도가 목적이다.
●통기타 문화 활짝 핀 ‘오비스 캐빈’과 ‘쉘부르’

유네스코회관 뒤편은 통기타의 메카 ‘오비스 캐빈’이 있던 곳이다. 1960년대 무교동에 ‘세시봉’이 있었다면 명동에는 ‘오비스 캐빈’이 있었다. 윤형주와 송창식, 조영남, 신중현 밴드 그리고 대학생 양희은까지 출연했는데 실은 ‘세시봉’과 출연진이 많이 겹쳤다. 윤형주의 기억에 따르면 음악 PD와 대중문화 담당 기자를 포함해 음악 좀 안다는 사람이 다 ‘오비스 캐빈’에 모였다. 화장을 하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여고생도 많았다고 한다.

1973년 종로2가에 문을 연 ‘쉘부르’는 2년 뒤 지금의 명동예술극장 대각선 맞은 편 골목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MBC 라디오 PD 겸 DJ였던 이종환과 남성 듀엣 쉐그린 등이 만든 음악감상실이다. 종로 시절에는 김정호 이수만 권태수 김세화 어니언스 등이, 명동 시절에는 남궁옥분 이문세 최성수 신형원 그리고 개그맨 주병진 등이 활약했다.

명동 유네스코회관. 건축가 배기형의 작품으로 1966년 지어졌다.
●중국 분위기 엿볼 수 있는 차이나타운

중국대사관 일대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 중 하나다. 1882년 8월 조선과 청의 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조선으로 건너온 청 상인들은 특유의 결속력과 근면함으로 돈을 모아 이 일대 부동산을 사들였다. 명동에 중국인 여행자가 특히 많은 것이 아무래도 이런 인연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지금 중국대사관이 있는 곳은 천주교인을 무자비하게 박해해 원성이 자자한 구한말 포도대장 이경하의 집터다. 그의 집에 청의 위안스카이가 거주한 것이 지금의 중국대사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사관 옆에는 한국한성화교소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인천화교소학교에 이어 1909년 한국에서 두 번째로 문을 연 화교 학교다. 한성화교중고교는 연희동에 옮겨갔으며 그 근처에도 차이나타운이 형성돼 있다. 중국대사관 부근에는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이 줄지어 있어서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과거보다 중국 분위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주한 중국대사관 건물. 조선말 포도대장 이경하의 집이 있던 곳이다.
명동의 중국 음식점 거리. 이 골목을 따라 걸어가면 주한중국대사관이 나온다.
한국한성화교소학교 정문. 소학교와 유치원이 같이 있다.
●명동의 주인공은 음식 노점과 화장품 가게 젊은이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명동에는 칼국수, 돈까스, 충무김밥, 곰탕, 국수, 딤섬(중국식 만두) 등 맛난 음식이 많다. 삼계탕, 설렁탕, 냉면 등도 맛이 좋고 빵, 닭 강정, 바나나튀김 등 젊은이를 겨냥한 먹거리도 풍성하다. 인터넷에는 명동 음식 베스트 10이니 베스트 20이니 하는 글이 적지 않다.

요즘은 길거리 음식이 압권이다. 과일 주스는 기본이고 삼겹살 구이, 꼬치, 꿀, 오징어 구이, 떡갈비 완자, 새우 튀김, 스테이크, 장어구이, 문어다리, 닭발, 꽃게 튀김 등 ‘설마 이런 것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양한 먹거리가 유네스코길 초입에서 명동예술극장으로 이어지는 길 양쪽에 펼쳐져 있다. 먹기 좋은 모양이 눈을 설레게 하고 달콤한 냄새는 코를 흥분시킨다. 그것을 먹는 사람의 얼굴에서 주린 배를 채운다기보다 특이한 경험을 한다는 기대감이 묻어난다. 길거리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 함께 뿜어내는 열기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볼거리다.

명동의 거리 음식. 무척 맛있어 보인다. 명동 거리에는 이런 가게가 줄지어 있다. /2016-09-12(한국일보)/그림 11명동의 거리 음식.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밤 늦게 거리에서 음식을 만드는 젊은이들의 얼굴이 가로등과 네온사인 불빛을 받아 발그스레하다. 자신은 노점 앞에서 도시락이나 컵밥으로 한끼를 급히 때우면서 손님에게 웃으며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 그들의 수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인데도 지치지 않고 제 일을 한 이들은 과거의 문화예술인 못지 않은 명동의 주인공이다. 무심한 쇼핑객과 관광객에게 쉬지 않고 말을 건네는 화장품 가게의 젊은이들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명동을 걸을 때마다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화장품 가게 앞에서 점원들이 행인들에게 제품을 설명하고 있다.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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