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당신에게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중한 하루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길 바란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한다면 자신을 위해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를 테니까.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상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독립적인 의지를 지닌 특별한 동물이다.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그(녀)가 속한 공동체의 의지와 견주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찾아 그 안에서 생존하는 사회적인 동물이기도 하다.

언제였던가. 내가 완벽한 자유를 누리던 시간이!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자발적으로 신나게 행동했던 시절이! 거의 30년 전, 한 수업에서 내 심장에 숨겨진 ‘자유’라는 사랑스러운 영혼이 눈을 비비며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강독하는 수업이었다. 못과 같이 생긴 글자인 쐐기문자로 깨알처럼 빼곡하게 기록된 토판문서를 처음 읽었다. 이 토판문서는 이라크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지난 3,500년 동안 구워져 다이아몬드보다 견고했다.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협곡을 초월해서 한 무명의 시인이 적은 서사시가 내 눈앞에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영웅 길가메시는 순간을 사는 인간의 염원인 영생을 습득하는 기술을 노래한다. 그때부터 나는 기꺼이 이 서사시가 기록된 쐐기문자 언어인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매일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마치 다른 별의 언어와 같은 신기한 글자를 백 번 이상 베껴 그리며 나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날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지못해 하는 힘든 노동이지만 나에겐 최고의 사치를 누리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나에게 최고의 선물인 자유를 선물해 준 소중한 친구였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지성소(至聖所)와 같은 거룩함이었다.

고전 히브리어에 신기한 단어 하나가 있다. ‘아보다’(abodah)라는 명사다. 이 단어는 우리가 보기에는 상반된 의미들을 동시에 품고 있는 파라독스다. ‘아보다’의 첫 번째 의미는 ‘일하다; 노동하다’이다. 특히 농부가 가을에 곡식을 추수하기 위해 봄에 들에 나가 씨를 뿌리고 김을 배고 땅을 개간하는 일련의 힘든 노동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인간이 농업을 기원전 12,000년에 발견하면서 문명사회로 진입했다. 문명은 바로 인간의 땀과 피로 얼룩진 노동으로 이루어진 붉은 카펫이다.

‘아보드’는 겉보기에는 노동과 전혀 상관없는 또 다른 의미를 지녔다. 바로 ‘신에게 예배하다; 자신을 위한 최선을 축하하다’이다.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한 날을 정해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폭력적으로 금지하였다. ‘안식일’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사바스(Sabbath)는 수동적으로 쉬는 날이 아니라, 구태의연하게 습관적으로 선호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신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날이다. 그래야 앞으로 일주일 동안 행하게 될 ‘노동’이 자신을 위한 최선을 수련하는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노동은 신을 위한 예배이며 자신의 최선을 성취하기 위한 축하다.

‘자유’(自由)는 자기 스스로가 원인이자 결과인 상태이다. 자신의 고유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깊은 성찰에서 나와 후회가 없는 삶의 스타일이다. 자유는 스스로 간절하게 원하는 바를 유유자적하면서 노닐 때 슬며시 자신의 모습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자유(自由)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거침없이 행하는 자유(自遊)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어떻게 무심하면서도 고요하게 내가 원하는 바를 행하면서 살 수 있을까.

영어에서 ‘자유’를 의미하는 형용사 프리(free)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 이외에 ‘사랑의 빠진 상태’란 뜻이다. 자유는 외부의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일한 사랑을 찾아 그것에 빠지는 행위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만나는 존재를 프리와 같은 어원을 지닌 프렌드(friend), 즉 ‘친구’라고 부른다.

자유는 내가 내 목숨보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과 일치가 될 때 모습을 드러내는 보물이다. 내가 사랑하는 나만의 노래를 부를 때 다가오는 내면의 친구다. 그 사랑은 외부의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내 밖에 떠도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심장 안에 숨어있는 보물이다. 그것이 내게 보물인 이유는 내가 마음의 연못으로 깊이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내려가면, 그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새로운 연재를 ‘승화’(昇華)라고 부르고 싶다. 과학에서 ‘승화’는 고체에 열을 가해 액체가 되지 않고 바로 기체가 되는 현상이다. ‘승화’는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는 완벽한 변신과 변형의 과정이다. 밖에서는 볼 수 없지만 고치 안에 일어나는 천지개벽이다. 내가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나는 자유로운가. 나는 사랑에 빠져있는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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