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톡 2030] 문화계에 번지는 페미니즘

올해 페미니즘 서적 구매 비중
20대 이하 여성이 절반 육박
차별로부터 방어할 무기로 인식
성차별 다룬 웹툰ㆍ영화도 인기
일상에서 문제제기 긍정적 변화
페미니즘 지향 목소리 커졌지만
반대편 목소리도 커져 충돌 잦아
페미니즘 논쟁에 문화계가 빨리 젖어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적응이 현실적 효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메갈리아 논란 이후 문화계에 서서히 페미니즘이 번져나가고 있다.

변화가 도드라지는 곳은 출판시장이다. 출판 시장 전체는 불황이라지만 페미니즘 서적의 출간은 크게 늘었다. 올해 스타트를 끊은 것은 나이지리아 출신 소설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테드(TED) 강연과 인터뷰를 담은 얇은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합니다’(창비)였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이후 관련 서적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 집계에 따르면 올해 판매량 순으로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은행나무), ‘아주 작은 차이’(이프),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등이 인기를 얻었다. 알라딘의 박태근 MD는 “페미니즘 책은 2011년부터 매년 평균 70종이 출간됐는데 올해는 100종이 출간 될 것을 예상한다”면서 “출판계에서도 페미니즘은 한번은 짚어볼 문제라는 의식이 있고 여기에다 강남역 살인 사건 등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까지 겹치면 페미니즘 책의 출간이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관심 40대에서 20대로

페미니즘 책이 쏟아지는 데는 상업적 이유도 있다. 아무래도 책을 많이 소비하는 여성 독자들에게 인기가 높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으로 분류된 서적의 판매량도 전년 대비 증가율이 지난해엔 171%, 올해엔 8월까지 159%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지점은 성별ㆍ연령별 구매 비중이다. 2014년에는 40대 여성 구매 비중이 24.2%로 가장 높았지만, 올해엔 20대 이하 여성들의 구매 비중이 42.5%다. 대학시절 전통적 여성 운동의 세례를 받은 여성들에게서, 그런 것에 대해 잘 모르는 새로운 젊은 여성들에게로 페미니즘의 중심 축이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페미니즘에 관심가진 젊은 여성들은 페미니즘 책들을 사모은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린다. 세상에 맞설 '무기'가 확보하고 이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의 이진옥 대표는 이 흐름을 ‘세대 교체’ 혹은 ‘변화의 바람’으로 해석했다. 이 소장은 “메갈리아 논쟁으로 분출되어 나온 최근 페미니즘 얘기들을 보면 서울 몇몇 대학의 여성주의 수업을 통해 유통된 고학력ㆍ수도권 여성들의 소위 ‘먹물 페미니즘’과 다르다”면서 “역설적으로 여성을 둘러싼 여건이 너무 열악해져 현실 상황에서 많은 차별을 접하고 느끼다 보니 여성 스스로가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는 이상 자신을 보호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한 무기로서 책을 찾아 드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이 소장은 그런 차원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메갈리아 논쟁에 대해서도 찬반을 떠나 긍정적 역할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소한 ‘페미니즘은 괜찮다, 메갈리아만 아니면 된다’는 얘기를 이끌어내고 있지 않느냐는 거다.

이런 흐름은 다른 문화 영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레진코믹스에 연재 중인 웹툰 ‘레바툰’은 ‘썸이나 한번 때리자’며 여성을 끌고 가는 장면에서 ‘데이트 강간’을 떠올리게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처음엔 ‘지나친 비판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던 작가 레바는 이후 트위터에 페미니즘 입문서인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고 있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만화를 그리고 싶진 않다”는 게 변신의 이유다. ‘흙수저 밴드’로 이름을 알렸으나 ‘야동을 보다가’ 같은 노래 때문에 ‘여혐 밴드’라 지목당한 중식이 밴드 역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같은 책을 읽으며 페미니즘을 공부 중이라고 밝혔다.

네이버 웹툰 '내 ID는 강남미인'의 한 장면. 남자 기준에 맞춘 외모지상주의와 성형문제를 다룬 웹툰으로 열렬한 반응을 얻고 있다. 작가 제공

네이버에 연재되는 웹툰 ‘내 ID는 강남미인’은 외모지상주의와 여기서 비롯되는 젠더 폭력을 꼬집은 내용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요일별 인기 순위를 보면 토요웹툰 가운데 2위다. 매회 1만개가 넘는 댓글이 달릴 정도로 반응도 뜨겁다. 주인공은 ‘대공사’를 거쳐 추녀에서 미녀로 거듭났지만 여전히 불행하다. ‘성괴’(성형괴물)로 보는 주변 시선에 주눅들어서다. 그러다 이런 조언을 듣는다. “예쁜 건 힘이 맞아요. 하지만 그 힘, 누가 원하기 때문에 주어진 걸까요?” 영화 쪽에서는 20세기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그린‘서프러제트’(Suffragette)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미러링 해보고 해방감 느꼈다”

이런 문화를 접하면서 변화를 꾀하는 여성들이 2030 세대에서 늘고 있다. ‘내 ID는 강남미인’을 즐겨본다는 박지원(25)씨는 성형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질문을 “사이다 같은 장면”으로 꼽았다. 이주영(28)씨도 “이 웹툰을 보면서 다름 사람에 대한 외모를 함부로 언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윤상훈(23)씨는 “‘서프레저트’ 같은 영화를 통해 한국 사회 내 여성의 위치를 다시금 되돌아봤다”고 했다. 페미니즘에 관심 가지고 책을 찾아보던 대학생 김명준(25)씨는 최근 여혐 표현이 많은 또래들의 단톡방을 나왔다. 그는 “예전엔 막연히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생각했던 것을 확실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대학 4학년인 이선민(23)씨는 요즘 주변의‘남자사람 친구들’의 변화에 한번씩 놀랄 때가 있다고 했다. “늘 ‘여자가 조심해야 한다’ ‘짧은 옷이나 야한 옷 입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녀석들이 이제는 ‘남자들이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최근 ‘강남패치’ ‘한남패치’ 검거 동영상이 한을 품은 여성들의 일대 소동이라는 자극적인 틀로 보도되자 “연쇄 살인마라도 잡았느냐” “이 나라는 여자한테 더 가혹한 헬(Hell)”이라며 핏대를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이씨는 “‘메갈리아 논쟁’에 대한 의견은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페미니즘을 여전히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도 많지만 그래도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오가면서 남자들이 ‘이게 뭘까?’ 한번 더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효과는 여성에게도 나타난다. 페미니즘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채선영(29)씨는 최근 페미니즘 문화를 접하면서 스스로 ‘미러링’을 해보며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하면 살을 좀 뺄 수 있을까, 예쁘게 화장을 잘 해볼까 생각했었다”는 채씨는 페미니즘 논쟁을 접한 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남자들의 외모와 차림새를 두고 점수를 매겨봤다고 한다. “남들 보기에 어떨까 하고 평가 당하는 시선을 당연하게 여기다가 평가하는 사람의 위치에 올라본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고 해방감을 느꼈어요.”

약자 목소리 낼 때 충돌은 불가피

그러나 ‘이런 작은 변화의 움직임들이 큰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말하긴 이르다. 웹툰만 해도 취재를 위해 페미니즘 성향의 작가들에게 연락하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는데 잘 봐줘서 고맙고 기쁘다”면서도 막상 공개 인터뷰는 정중히 사양했다. 워낙 날카로운 주제라 한번 논란이 불붙기 시작하면 어떻게 제어할 도리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메갈리아 티셔츠를 인증한 성우와 이를 지지한 웹툰 작가들이 겪었던 어려움이나, 메갈리아 기사 때문에 시사주간지 ‘시사인’이 격한 항의와 절독 사태에 시달리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라는 책에서 여성혐오 현상을 분석한 사회학자 오찬호는 “거듭된 문제제기와 논쟁을 통해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한층 더 정교해졌고 또 그에 따른 비판과 고발도 크게 늘어난 건 사실”이라면서도 “그럼에도 페미니즘은 그 논리 전개상 남성들의 특권의식을 짚어낼 수 밖에 없는데, 그런 부분에서 ‘왜 남녀 대립구도를 만드냐’는 항의가 생기면 딱히 할 말은 없다”고 말했다. “반가운 변화의 징조가 있지만 페미니즘이 주도권을 잡았다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더 치열한 싸움을 겪어야 한다고 본다”는 얘기다. 그런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배제된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공론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수단은 ‘대화’라기보다 ‘충돌’일 경우가 많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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