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기술자 넘어 예술가로 ‘21세기 다빈치’ 꿈꾼다

입력
2016.09.07 20:00
0 0

“모든 예술가는 메이커”

르네상스 시기까지 구분 모호

백남준 비디오아트도 좋은 사례

기술을 새 도구 삼아 표현하고

‘낯설게 하기’로 시대에 저항

“기술은 소통의 장치”

기술 ‘블랙박스’ 봉인 뜯어 내

사람을 소비자 아닌 주인으로

배타적 가치관ㆍ차별 뛰어넘어

‘제3의 언어’ 소통 가능성 열어

메이커 겸 미디어 아티스트 최재필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빠졌다. 그가 자란 지방 도시에 하나뿐이던 컴퓨터 학원에서 컴퓨터 언어를 접하면서 매혹됐다. 하지만 그걸 왜 배우는지,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몰랐다. 프로그래밍을 해서 공장을 돌릴 수 있고 음악이나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컴퓨터게임만 했다.

메이커에서 예술가로

지금 그는 단순한 프로그래밍 기술자가 아니라 미디어 아티스트다. 2009년 웹에이전시협회가 주최한 웹아트 전시에 참여하면서 미디어아트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미디어아티스트를 위한 프로그래밍 강의를 하면서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수강생들에게 묻고 배우면서 예술이라는 낯선 세계를 익혀가던 그가 작가로서 처음 관객을 만난 것은 2014년 가을 메이커페어 에서다. 당시 그는 컴퓨터 파일을 받아 먹으면서 혼자 노는 스마트폰 ’스마트 버디’를 만들어 갖고 나갔다. 파일을 휴지통에 버리면 꿀꺽 삼키며 좋아하고 받아 먹은 음악 파일을 노래로 불러주는 스마트버디는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신이 나서 이틀간 내내 밥도 안 먹고 현장을 지키며 설명을 했다. 이 작품이 인연이 되어 디지털아트 전문 미술관인 아트센터 나비의 해커톤과 전시에 참여하면서 그는 비로소 ‘작가’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웨어러블 테크놀로지’를 주제로 한 나비의 2015년 전시에서 그는 ‘잠복소’(해충 방제를 위해 겨울 나무에 두르는 짚)를 발표한다. 디자이너 김지예씨와 협업한 이 작품은 사람이 내뿜는 날숨에 반응해 숨 쉬는 나무다. 죽은 듯 보이는 겨울 나무가 인간과 숨을 교환하는 생명임을 실감케 하는 이 작품은 기술이 작가의 메시지를 담은 예술로 확장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최재필의 '잠복소'. 관객이 뱉는 날숨에 반응해 크게 숨 쉬는 나무로 웨어러블 기술을 활용한 작품이다. 사진 제공 아트센터나비
최재필의 '잠복소'. 관객이 뱉는 날숨에 반응해 크게 숨 쉬는 나무로 웨어러블 기술을 활용한 작품이다. 사진 제공 아트센터나비

그는 무언가를 만들고 공유하는 기술 기반 메이커가 예술 창작으로 영역을 넓힌 사례다. 현재 UX 컨텐츠 제작업체에서 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그는 “아직은 작가로 불리기가 부끄럽다”면서 “메이커와 예술가라는 두 세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술을 도구로 뭔가를 표현한다면 메이커도 작가일 것”이라며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내 색깔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모든 메이커가 작가는 아니지만, 모든 작가는 메이커”라고 생각한다.

메이커와 예술가, 기술과 예술은 어디서 겹치고 어디서 갈라지는가. 아트센터나비의 연구원으로2015년 가을전시 “메이커블 시티’를 진행했던 이 미술관 연구원 전혜인씨는 “둘의 경계는 모호해 보이지만, 메이커와 예술가의 공통점은 저항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한다. 예술은 익숙한 것, 일상적인 것을 다르게 보고 낯설게 만드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대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메이커블 시티’는 개방과 공유의 흐름 속에서 창의적인 메이커와 융복합 예술가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도시의 모습을 제시하는 전시였다. 스스로를 ‘뭔가 연구하고 만드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디자이너 현박은 ‘다면화병제작소’라는 작업으로 이 전시에 참여했다. 오픈소스를 활용해 직접 만든 대형 3D프린터로 다면체 화병을 출력하는 이 작품은 관객이 모델링 값을 줘서 형태와 크기를 완성한다. 관객이 모델링한 디자인은 실시간으로 업로드 되어 데이터를 공유한다. 만들어진 결과물보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작업은 3D프린터 같은 디지털 창작 도구에 의한 제조기술의 개인화와 이에 따른 생산 패러다임의 변화를 생각케 한다.

디자이너 현박의 '다면화병제작소'. 오픈소스를 활용해 만든 자작 3D프린터로 뽑은 이 화병들은 관객의 모델링으로 완성된다. 사진 제공 아트센터나비
디자이너 현박의 '다면화병제작소'. 오픈소스를 활용해 만든 자작 3D프린터로 뽑은 이 화병들은 관객의 모델링으로 완성된다. 사진 제공 아트센터나비

예술과 기술의 재회

사실 예술(art)과 기술(technology), 두 단어는 그리스어 ‘테크네’라는 공통 어원을 갖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둘은 하나로 통했다. 다빈치는 수많은 기계적 장치를 고안한 기술자이기도 하다. 20세기 후반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또한 기술과 예술을 매개하는 전자무당의 예술굿이다. 스스로 만들고 만드는 방법을 공유하는 최근의 메이커운동은 전문가나 숙련된 장인의 몫이었던 기술을 누구나 활용할 수 있게 돌려줌으로써 개인 제작 또는 창작의 가능성을 넓혀가고 있다. 기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예술과 기술이 재회하는 장면도 많아졌다. 흔히 이런 현상을 ‘융합’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작가이자 교육자로 퍼포먼스, 전자장치, 드로잉과 스토리텔링을 수반하는 작업을 해온 최태윤씨는 “나는 내 작업을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융합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고 말한다. 왜 불편하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은 답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융합이라는 표현은 각기 어떤 것이 빠진 두 객체가 절충된 제 3의 객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기술에는 예술적인 면이 있고 예술도 상당히 기술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둘은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전자회로의 PCB(인쇄회로 기판) 패턴은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 개발을 하는 엔지니어도 예술가와 다를 바 없이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하는 창작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도예가는 흙과 물에 관해, 안무가는 몸과 움직임에 대해 고도의 전문기술을 갖고 있다. 융합이라는 단어는 예술과 기술이 각기 가진 예술성과 기술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뉴욕에 살면서 지난 10년 간 컴퓨터, 소프트웨어, 기술, 예술의 관계를 연구하고 작업해 온 그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1일 개막한 ‘미디어시티 서울 2016’ 에 자신이 기획한 ‘불확실한 학교’라는 프로그램으로 참여 중이다. 예술과 기술, 장애의 관계를 다루는 워크숍과 공개 세미나, 전시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학습해온 배타적 가치관과 차별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다. 워크숍은 듣지 못하는 농인 작가들이 코딩을 배워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웹사이트를 만들고 동영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익히는 활동이다.

농인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코딩 교육 워크숍을 그는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려는 사회참여적 맥락의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 코드는 기술이 아니라 언어다. 인간과 기계 사이 제 3의 언어로서 코드를 안다는 것은 많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밥을 사 먹을 수도 있지만 직접 해먹을 수 있으면 더 좋은 것과 같다. 코드는 어떤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도 차별이 없는 정직한 언어다. 장애 예술가, 활동가들과 함께 코드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 쾌감을 느낀다.”

최태윤의 손으로 만든 컴퓨터. 기술의 탈신비화를 통해 기술에 대한 소유권 회복을 주장한다. www.taeyoonchoi.com
최태윤의 손으로 만든 컴퓨터. 기술의 탈신비화를 통해 기술에 대한 소유권 회복을 주장한다. www.taeyoonchoi.com

기술의 접근성-블랙박스를 열어라

그는 “기술은 예술의 매체이자 시민을 위한 소통의 장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장애인이라 해도 기술은 접근하기 힘든 대상일 때가 많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기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오픈소스 기반의 메이커운동조차 중산층의 취미적 요소가 있는 게 사실이다. 봉인된 블랙박스처럼 속을 알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는 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단순 소비자로 묶어 버린다. 봉인을 뜯어내는 작업으로 그는 2013년부터 원시적인 컴퓨터를 만들어 왔다. 전자부품과 디지털 논리 집적 회로를 사용해 손으로 만든 어설픈 컴퓨터다. 이 작업의 목표는 뛰어난 기술적 성취가 아니다. 핵심은 기술의 ‘탈신비화’이고 이를 통해 도구에 대한 소유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직접 컴퓨터를 만들어보니 나와 기계의 관계가 바뀌었다. 기계(기술)이 내 것이 되었다. (기술)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 자율성을 회복하면서 (기술에) 의존적이지 않게 됐다”고 말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아트팹랩이 키덜트를 주제로 진행한 아트팹랩 챌린지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달걀미술관. 완성을 앞둔 멘토링 장면이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아트팹랩
국립현대미술관 아트팹랩이 키덜트를 주제로 진행한 아트팹랩 챌린지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달걀미술관. 완성을 앞둔 멘토링 장면이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아트팹랩

새로운 기술은 도구나 수단 또는 그 자체로 예술적인 매체로서 예술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기술이라는 블랙박스를 두려움 없이 뜯어보고 해킹하곤 한다. 거기서 새로운 영역이 펼쳐진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자리잡은 아트팹랩이 최근 주최한 ‘아트팹랩 챌린지-키덜트 랜드’는 예술가와 메이커들이 함께했다. 디자이너, 작가, 메이커로 이뤄진 9개 팀이 키덜트를 주제로 8월 20일부터 9월 3일까지 2주 동안 예술과 기술을 결합한 작품을 만들었다. 3D프린터, 레이저커터 등 아트팹랩의 디지털 장비를 제작에 사용했다. 최우수상은 달걀미술관 팀이 차지했다. 달걀미술관은 학교 앞 문구점에서 흔히 보는 캡슐 뽑기 자판기와 닮았지만, 캡슐 안에는 장난감이 아니라 미술 작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생각이 담긴 글이 들어있다. 뽑기놀이하듯 돈을 넣고 작품을 뽑는 이 이동형 미술관은 작품을 감상하고 전시하는 새로운 형식을 제안한다. 예술가들의 기술놀이가 단순히 신기한 볼거리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은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이같은 제안과 질문 때문일 것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