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톡 2030] 인터넷, SNS서 놀이문화로 확산

“길에서 목성 주웠다”는 허언에
“아이스박스에 넣으면 냉동 효과”
“위성들이 엄마 찾고 있어요” 등
재치 있는 답글들로 받아쳐
‘허세형 글+적절한 사진’ 활용
취업난 등 세태 풍자하기도
“현실에 절망한 2030의 심리가
허언증 놀이로 발전한 것” 분석
편의점 갔다 오다가 목성이 떨어져있길래 주웠다는 허언증 놀이에 첨부된 사진. 디시인사이드 캡처

“편의점 갔다 오다가 목성이 떨어져있길래 얼른 주웠어. 첨엔 그냥 돌 인줄 알았는데 혹시나 해서 하늘을 보니 목성자리가 비어있더라. 아마 대기권에서 타서 많이 작아진 것 같아. 인공위성이나 별똥별은 많이 주워봤는데 행성은 처음 줍는다. 사촌 형이 김정은이라 대충 아는데 미국이 핵폭탄 실험하다가 떨어뜨린 것 같아. 일단 냉장고에 넣어놨는데 행성 주워 본적 있는 사람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좀 알려줘.”

한 인터넷 사이트에 대리석 무늬의 공 형태 조각물 사진과 함께 올라온 글이다. 이 글은 누가 봐도 ‘거짓말’인 것을 알지만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재미있어하며 ‘거짓말 댓글’로 화답했다. ‘그거 아이스박스에 넣으면 냉동효과 최곱니다’‘목성 지구에 가져오면 터져요. 대기권에서 다 타버렸어야 됐는데 시간 팽창으로 아직은 괜찮은 듯하니 빨리 제자리로 돌려 놓으세요. 목성 위성들이 엄마 찾고 있어요’ ‘목성의 비밀이 들킬 것을 우려한 NASA에서 목성을 축소화해 가져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112에 전화 주시면 신속히 수거해 가겠습니다.’

이게 웬 황당한 글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20~30대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허언증 놀이’ 중 하나이다. (▶ 마케팅으로 진화한 허언증)

허언증이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그걸 그대로 믿는 병 또는 증상을 말한다. 처음에는 허구임을 알고 거짓말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짓말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허언증 놀이는 실제 허언증 환자들이 아닌 20~30대를 중심으로 농담 섞인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재치 있게 받아치는 웹사이트 상의 일종의 놀이다.

허언증 놀이가 확산되기 시작된 것은 지난 1월 온라인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 ‘허언증 갤러리’가 생기면서부터다. 디시인사이드에 임시로 문을 연 지 일주일 만에 ‘핫’한 반응을 이끌며 정식 갤러리로 승격했다. 이용자들은 누가 봐도 허무맹랑은 거짓말을 매일 수십 건에서 많게는 수백 건의 글을 공유하며 허언증 대결을 펼친다. 허언증 갤러리 인기에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도 유사한 허언증 놀이방이 생겨났고 개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도 번졌다.

허언증이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그걸 그대로 믿는 병 또는 증상을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허언증은 대부분 자기 과시가 주를 이룬다. 한 누리꾼은 ‘하버드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눈물이 납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버드대 총장에게서 온 카카오톡 메시지 인증사진을 첨부했다. 내용은 하버드대 총장이 한글로 ‘나’에게 합격 축하 소식을 전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총장이 직접 카카오톡을 통해 한글로 합격 소식을 알릴 리 없지만, 누리꾼들은 이러한 거짓말도 애교 있게 받아들이며 ‘축하한다’는 댓글을 남겼다.

이 밖에도 세계 5대 난제를 순식간에 풀고, 그것도 모자라 공간의 비밀도 풀릴까 봐 걱정하는 고민과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아이돌 그룹 멤버 ‘설현’과 ‘혜리’가 데이트하자고 졸라 피곤하다는 내용 등의 글도 인기를 끌고 있다.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떠는 허세형도 있다. “요즘 해변가에서 모래성 쌓는 재미로 사네요”라며 이집트 피라미드 사진을 첨부하는가 하면 “제가 요즘 취미로 키우고 있는 고양이입니다”라며 스핑크스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이렇게 애교 섞인 허세형 게시물들은 센스 넘치는 멘트와 적절한 사진으로 인기를 끈다.

심각한 취업난을 비꼬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새벽타임 편의점 알바를 목표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 현대자동차 경영지원팀에서 경력을 쌓고 있습니다. 토익 만점은 기본이고 공인회계사(CPA) 자격증을 비롯한 각종 세무 관련 자격증을 보유 중인데 오늘 편의점 알바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네요. 2차 면접까지 붙었을 때 부모님께서 많이 기대하셨는데 최종에서 떨어지니 더 많이 아쉽습니다.” 이 글은 젊은 세대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소재로 취업난에 시달리는 20∼30대의 고통을 꼬집으면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이번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됐는데, 노벨상이 9급 공무원 시험에 가산점이 있나 궁금하다”는 글에서는 취업난으로 많은 젊은이들의 동경 대상인 9급 공무원 합격이 노벨상 수상보다 어렵다고 풍자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허위ㆍ과장글을 작성하는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과거에도 남을 속인다는 짜릿함과 과시욕을 엿볼 수 있는 글은 꾸준히 있었다. ‘낚시주의’라는 머릿글을 달고 대놓고 ‘나 거짓말 할 테니 속을 테면 속아봐’라며 사람들을 끄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허언증 갤러리처럼 아예 거짓말의 장을 열어놓는 장소가 생긴 사례는 이전에는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다.

이 같은 허언증 놀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각박한 현실에서 학력과 스펙, 집안 등을 거짓말하면서 남들을 속여 갈증을 해소하려는 심리가 낳은 현상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김영한 정신과 전문의는 “노력하면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헛된 꿈을 꾸는 데 시간을 소모하지 않지만 요즘은 그런 믿음이 없는 현실에 절망한 젊은 세대의 심리가 허언증 놀이로 반영된 것”이라면서 “허언증 놀이가 현실 풍자와 해학적 요소를 담고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김기중 기자 k2j@hankookilbo.com

마케팅으로 진화한 허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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