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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과 춘원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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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과 춘원이 누구인가”

입력
2016.08.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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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태평양전쟁 중 일본에서 만난 문인들. 왼쪽부터 윤석중, 최남선, 이광수, 마해송, 김을한. 한국일보 자료사진
1943년 태평양전쟁 중 일본에서 만난 문인들. 왼쪽부터 윤석중, 최남선, 이광수, 마해송, 김을한.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문인협회에서 최남선문학상과 이광수문학상을 제정한다는 갑작스러운 발표에 이어 며칠 만에 이를 철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광수와 최남선 두 문인의 친일 행적 때문에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문학작품은 작가로부터 독립된 생명체이고, 그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사장시킬 이유가 없어 상을 제정하게 됐다”(문효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며 취지를 밝히던 기개는 온 데 간 데 없고, 이런 중대 결정을 발표한지 불과 일주일도 안 되어 제정을 간단하게 철회한 것이다. 나는 이 상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가 해프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한국사회 많은 곳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문제 상황을 너무도 낯 뜨거운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인협회에서 밝힌 이 상의 기본 취지는 예전 미당문학상처럼 친일 논란이 있는 작가의 상을 제정할 때와 똑같은 논리구조를 취한다. ‘문학적 성과와 작가의 행적은 별개’라는 간단한 논리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간단할까. 나 역시 문학공부를 하는 ‘업계 사람’으로서 저 논리를 ‘심정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곤 하지만, 저 논리의 난센스는 작가의 행적과 작품을 분리할 정도로 별개인 일이 실은 ‘문학작품 내적으로’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작가의 혼이 깃든 ‘작가의 자식’이 작품이기에 작품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작품과 작가가 따로 노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당과 춘원이 누구인가. 그들은 미당 서정주와도 전혀 다른 유형의 문인이다. 미당의 특별한 문학적 재능이 문학사적 영향력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들은 당대를 대표하던 지식인으로서 한국지성사와 현실정치, 풍속(문화) 차원에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들이었다. 미당의 친일이 시류 차원에서 이루어진 허약한 개인의 줄타기 성격이 강했다면, 이들의 친일은 철저히 신념에 의한 것이었고, 그 신념을 정치적 현실에 확대ㆍ재생산하는 데 그들은 매우 능동적이며 철저했다. 미당문학상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작가들의 의견이 갈리고, 현재는 좋은 작가들도 이에 상당히 많이 참여하고 있으며, 내 경우 역시 고민 끝에 미당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지만, 만일 그 상이 춘원과 육당의 것이었다면 이 고민의 양상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육당이 조선사편수회위원으로 만들어낸 식민역사학이나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친일고위관리를 조직적으로 양성한 일, 춘원이 어용친일단체인 조선인문인협회장이 되어 ‘명문장으로’ 쓴 수많은 친일 논설과 학병 권유를 위한 열혈 활동은 단순 친일 가담이 아니었다. 그들은 친일 이데올로기의 ‘우두머리’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시(육당, ‘해에게서 소년에게’ 1908)와 한국 최초의 현대장편소설(춘원, ‘무정’ 1917)을 썼으며, 그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2ㆍ8독립선언문’(춘원)과 ‘3ㆍ1독립선언문’(육당)을 기초한 이들이 벌인 철저한 매국 행위는 한국지성사에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들이 정치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신적 표현으로 문학에도 깊이 스며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그러한 정도의 인식의 불균형은 그들이 본격적으로 정치행위에 나서기 전 그들의 문학-정신 행위에도 문제적으로 암시되어 있다.

예컨대 육당의 가장 큰 문학사적 업적으로 기억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망국의 시대에 도쿄에 있다가 돌아와 출판사를 차리면서 겨우 십대의 어린 나이에 자기가 만든 잡지에 발표한 글인데, 거기에는 서양-일본 문명에 대한 과도한 경사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불균형한 인식, 자기 역사와 전통에 대한 주체성의 결여가 역력히 드러난다. 조선 인민의 풍속사를 바꿔놓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끈 춘원의 ‘무정’은 망해버린 제 나라를 오히려 '진보의 낙원'으로 묘사하며 끝을 맺는다.(지금 한국문학사 연구와 국어교육의 심각한 문제점은 늘 '최초'라는 박제화된 기념비적 사실만 강조하지, 이런 표현들의 무의식이 현실에서 갖는 심각한 문제점은 따져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좋은 문학은 단순히 미사여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정신과 깊이 있는 생각과 전복적 시각을 적확한 언어형식으로 담은 글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비평가이자 현대문학연구자로서 “두 문인의 친일 행적 때문에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사장”되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이들의 문학적 성과는 문학사의 특수성과 당대의 대중적 영향력 때문에 그 동안 지나치게 과장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문학과 정치가 별개라는 문인협회의 논리는 정신과 표현을 기계적으로 분리해놓는 논리라는 점에서도 유아적이고 허구적이지만, 육당과 춘원의 경우 문학적 재능과 명성을 그들 스스로가 가장 적극적으로 정치에 이용하고 결합시킨 장본인이라는 점에서도 이 논리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이번 사태를 보며 나는 한국에서 ‘난립’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백 개의 문학상이 대체 지금 이 시대에 무슨 의미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또 한 번 회의하고 있다. 육당과 춘원이라는 엄청난 논란의 인물을 대상으로 상을 제정한다면서, 이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을 때까지 나 같은 업계 사람조차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얼 뜻하나. ‘쿠데타’를 벌이듯이 특정 조직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일방적으로 공표되는 이런 일들은 주체 측의 명분과는 달리 이것이 얼마나 자신감 없이 이루어지는 일인지를 스스로 증명하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지금 한국의 많은 문학상 제도가 운용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준다.

이 문제 상황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작가정신과 분리된 작가 이름의 사유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상의 제정에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은 거의 생략되며, 작가 이름에 걸맞는 작가가 상을 받는 경우도 많지 않고, 그 상의 운영 주체가 왜 그들인지, 그 운용 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다. 가장 전위적이고 전복적이며 복합적인 사유의 결정체여야 할, 그러므로 실은 어쩌면 가장 불편하기도 해야 할 문학이, 문학의 이름을 빈 특정 이익집단이나 문학을 관광산업으로 생각하는 지방자치단체나 기관들이 다루기 쉬운 ‘팬시상품’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예컨대 춘원과 육당이라는 거물의 이름을 건 상을 제정하려 했던 이 ‘대표적인’ 문인단체라는 곳이 정말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단돈 ‘100만원’의 상금으로 상을 제정하겠다는 발상을 과연 할 수 있을까. 문학을 정신의 전위와 무겁고 숭고한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면, 문학적 재능으로 벌어진 한국사의 가장 비참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해, 문학과 정치는 별개라는 발상을 그렇게 간단한 논리로 표명할 수 있을까. 정말 끔찍한 것은 시민 일반은 이런 계기를 통해 이런 수준의 논리와 행태들을 한국문학과 작가 일반의 수준이라고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한국문인협회는 이토록 파장이 큰 결정을 여론의 반발을 보더니 매우 간단히 철회하면서, 별다른 사과도 없이 “문협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자발적으로 중대 결단을 내린 만큼 모든 문인들이 이 상에 따른 논란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더 화합하기를 기대한다”는 코멘트를 내보냈다. 역사와 정치와 문학을 이토록 가볍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말을 다루는 작가단체라는 곳이 자기 생각과 말에 이토록 무책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화합”을 마치 자신들이 내려주는 은혜나 특혜처럼 언급하는 이 발언은, 말과 생각과 사회와 역사의 분열을 부추기는 부끄러운 일들이 바로 자신들이 한 이런 일들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김수영, ‘절망’)

지금 한국문학을 박제화하고 부패시키며 시민과 유리시키는 요소들은 문학 외부가 아니라 문학 내부에 있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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