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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수제 햄버거와 공중전화 박스

입력
2016.08.0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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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범람은 뉴스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훈련을 요구한다.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시대’(문학동네,2014)에서 뉴스 리터러시(News Literacy)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육에 대해 별의별 소리를 떠들어대면서도, 현대사회는 자신의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수단을 검토하는 데 참으로 무심하다. 우리는 태어나서 고작 18년 남짓 교실에 갇혀 보호받을 뿐, 나머지 인생은 사실상 어떤 제도권 교육기관보다도 더 커다란 영향력을 무한정 행사하는 뉴스라는 독립체의 감독 아래에서 보낸다. 일단 공식적인 교육과정이 끝나면 뉴스가 선생님이다. 뉴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만드는 으뜸가는 창조자다. 혁명가들이 그러하듯, 만약 당신이 한 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미술관, 교육부, 또는 유명 소설가들의 집으로 향하지 마라. 정치체의 신경중추인 뉴스 본부로 곧장 탱크를 몰고 가라.”

뉴스가 이처럼 중요해지면서 세계(현실)와 재현(뉴스)의 관계가 뒤집혔다. 프랑스의 언론인 플로랑스 오브나스가 철학자 미겔 베나사야그와 함께 쓴 ‘뉴스공장’(에코리브르,2006)은 어떤 현실이 있는 사실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뉴스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현되지 않으면 현실로 인정되지 못하는 이런 전도는, 재현을 원본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했던 플라톤적 사고를 낙후시킨다. 재현되는 것만이 기적처럼 존재하게 되는 전도 속에서 떠오르는 문제는 누가 재현의 권리를 갖느냐와 재현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한국일보’는 7월 23일(“뉴욕 버거 ‘쉐이크쉑’ 한국 상륙”)과 25일(“육식주의자를 위한 버거…20분은 줄 설 수 있는 맛), 쉐이크쉑 햄버거에 대한 연속 기사를 냈다. 30도가 넘는 폭염 아래 그것을 맛보겠다는 사람들이 몇 시간씩이나 줄을 섰다면 충분히 뉴스거리가 된다. 하지만 세 명의 기자를 투입해 전면을 할애해야 할 만큼 수제 햄버거가 중요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를테면 수제 햄버거보다 공익적인 가치가 높은 공중전화 박스는 한 번도 뉴스가 된 적이 없다.

거리나 지하철역에서 공중전화가 사라지고 있다. 숫자가 적어도 관리만 제대로 된다면,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 조금 더 걷는 수고를 해도 좋다. 그런데 가까스로 찾아낸 공중전화가 거의 고장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잘 없다. 뿐 아니라, 서울 시내 편의점에서 전화카드 사기도 힘들어졌다. 어쩌다 전화카드를 파는 가게가 있으면 싹쓸이를 해서라도 카드를 확보해 놓아야 한다. 공중전화 이용자로 남아 있기가 천연기념물처럼 어렵다. 이것은 왜 뉴스가 못 되는가.

플로랑스 오브나스와 미겔 베나사야그에 따르면, 신문이 정통 시사 문제를 다루던 지면을 갈수록 가벼운 지면으로 바꾸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 “너무 건조하거나 심각해 보이는 기사들은 독자들을 우울하게 한다는 이유로 자진해서 뒤로 한발 물러선다.” 그 빈 곳을 연예인의 사생활, 시시콜콜한 문화계 소식, 스포츠, 컴퓨터 게임, 건강, 요리 기사 등으로 채운다.

9월부터 시행될 김영란법은 언론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 셔드슨의 ‘뉴스의 사회학’(커뮤니케이션북스,2014)은 언론인과 취재원 사이의 일시적인 거래보다, “이들이 서로 비슷한 사회적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상관없이 언론인들은 그 사회의 주류와 “같은 소우주(microcosm)”에 속해 있다. “이들은 젊었을 때 같은 학교에 다니고, 이후에는 같은 지역에 살며, 같은 휴양지에 간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현실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저널리스트들과 정치인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미디어가 무엇을 보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신들만의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반 국민의 관심과 이해관계를 무시한다.” ‘뉴스의 시대’257~266쪽은 두 번에 걸친 쉐이크쉑 기사가 왜 그처럼 허전하게 느껴졌는지를 가르쳐 준다. 또 쉐이크쉑이 콜라를 끼워 팔기를 하는 이유는 에릭 슐로서의 ‘패스트푸드의 제국’(에코리브르,2001) 79, 80쪽을 참고하면 알 수 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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