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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친일 문학상’

입력
2016.08.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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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나치 치하의 파리를 해방시킨 뒤 프랑스 임시정부는 부역자 숙청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대상과 범위를 둘러싸고 곧 격론이 일었다. 특히 문인과 언론인의 처벌을 놓고는 관용론과 청산론이 충돌했다. 결국 청산론이 힘을 얻어 나치 동조 문인과 언론인 7명이 처형됐다. 소설가, 시인, 비평가, 극작가에 기자까지 겸한 젊은 천재 로베르 브라지야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재능을 아낀 문화계 인사들이 탄원서를 냈지만 사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글 쓰는 문인과 언론인에게 더 엄중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 프랑스와 달리 한국은 친일 문인을 단죄하지 않았다. 문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친일파도 거의 처벌하지 않았다. 그 중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운 특급 친일파다.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식민사학 수립과 역사왜곡에 참여했고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친일 관리를 양성했다. “일본의 존재와 발흥은 아시아의 기운이요 동방의 빛”이라며 일본을 찬양했고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황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 했다. 학병지원을 독려하기 위해 ‘보람 있게 죽자’ 같은 글을 마구 썼다.

▦ 이광수는 조선문학을 일제의 선전도구로 만들었고 가야마 미쓰오로 이름을 바꾼 뒤 ‘창씨와 나’라는 글로 창씨개명을 지지했다. “황민화가 될수록 조선 민족에게 행복이 온다”고 했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론을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모험이라고 선전했다. 그 역시 틈만 나면 학병 출진을 독려했다. 3ㆍ1독립선언서(최남선)와 2ㆍ8독립선언서(이광수)를 썼던 두 사람이 변절한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저 자기 신념에 따른 자발적 친일이었다. 이광수는 해방 후에도 자신의 행위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 한국문인협회가 최남선ㆍ이광수 문학상을 신설하기로 했다. 친일 행적 때문에 문학적 공로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유다. 잘못도 있지만 공적도 있다는 식인데 친일파의 전형적 자기 변명 논리다. 변명의 또 다른 유형으로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는 생계론,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 친일을 했다는 전민족범죄론, 유능한 친일 인사는 벌주지 말고 인재로 다시 쓰자는 인재론 등이 있는데 모두 비겁한 자기 합리화다. 반발이 뻔히 예상되는데도 거리낌 없이 친일 문인 추앙에 나서는 문인협회의 무모함이 놀랍다.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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