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천일야화] 18. 한민족공동체의 실험무대 연해주

※ 비단길 기행이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중남미를 둘러본 '시즌2'를 끝내고, 이번 회부터는 실크로드 구간 '초원의 길'로 다시 접어듭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골든혼이 짙은 안개에 파묻혀 있다. 골든혼은 터키 이스탄불과 이곳 두 군데가 대표적이다.

2년 전 이맘때인 2014년 7월20일 오전 10시10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행 대한항공 여객기가 인천공항 활주로를 날아올랐다. 이 비행기에 오르면서 하나 확인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었다. 바로 항로다. 여행후기 등을 보면 인천을 이륙한 여객기는 휴전선 아래로 동쪽으로 날아가 공해상으로 빠진 후 북쪽으로 90도 가량을 꺾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려니하고 좌석마다 부착된 모니터로 항로를 쫒았다.

그런데 웬걸 우리 여객기는 인천에서 날아올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큰 원을 그리는가 싶더니 서해로 빠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중국 다렌의 오른쪽으로 기수를 잡더니 중국 영공으로 북상했다.

당초 818㎞로 찍혀있던 인천과 블라디보스토크 간 직선거리는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지더니 급기야 980㎞까지 벌어졌다. 중국땅 한가운데서 동쪽으로 다시 방향을 바꾼 여객기는 2시간 정도 걸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스튜어디스에게 물었다. “동해로 빠져 올라가면 오히려 가까울텐데 왜 서해와 중국 노선으로 갑니까. 최근 북한이 사전통보 없이 동해상으로 미사일 발사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항로는 스튜어디스 소관사항이 아니었다. 잠시 후 기장에게 물어봤다는 스튜어디스는 “얼마 전까지 북한 영공으로도 비행을 했지만 돈을 많이 요구해 취소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어디서나 전통 목각인형인 마트로시카를 만날 수 있다.

분단이 낳은 조그만 불편을 경험하면서 우리 비행기는 블라디보스토크 상공에 도달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 곳은 바로 내가 실크로드 3대 루트 중 중국 몽골 러시아 등으로 이어지는 ‘초원의 길’ 출발지로 찍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비파형동검, 지석묘, 금관문화 등 선사시대부터 문명교류가 이어온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초원의 길이 발 아래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이 도시, 회색이 아니었다. 얼지 않는 항구, 부동항의 선입견만 갖고 있던 이 도시 색깔이 예상과는 영 딴판인 초록이었다. 여객기는 한번 착륙을 시도하다 다시 날아오르더니 크게 한 바퀴 선회했다. 그러다 착륙을 하니 승객들이 안도의 한숨에다 박수까지 보낸다.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의 거주지였던 신한촌에 한국과 북한, 고려인을 상징하는 3개의 탑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국인이라면 절대로 놓쳐서는 안될 곳이 있다. 신한촌이다. 연해주로 건너온 한인들이 1911년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곳은 한때 한인이 16만명을 넘었고 한국어 매체가 30여 종, 우리말을 가르쳤던 교육기관이 137개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성재 이동휘 선생과 헤이그 특사인 부재 이상설, 연해주 재정적 지원자인 최재형 등이 만든 권업회와 한민학교, 고려극장, 선봉신문사 등의 거점이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신한촌에서 조국 소식을 들었고, 무장유격대들은 이곳에서 무기와 탄약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1920년 4월 일제가 고려인에 대한 대대적 체포, 방화, 학살을 자행하면서 구한말 이후 축적된 민족운동 메카의 전통과 위상은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일제의 만행으로 300명의 고려인이 학살되고 수백 명이 체포됐으며 파괴와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여의도 면적의 3배나 됐다던 당시 신한촌을 가 보니 1999년 8월15일 해외한민족연구소가 3?1운동 80주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만 남아있었다. 한국과 북한, 고려인을 상징하는 3개의 큰 비가 각 지역 해외동포를 의미하는 8개의 작은 비가 어울려 있었다.

하지만 철창으로 굳게 닫혀 있는 이곳이 현지 사회에서 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역사회와 단절된 이방인의 자취로만 비쳤다.

러시아 키릴문자를 만든 키릴형제의 동상이 블라디보스토크 독수리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연해주는 동해로 빠지는 두만강 하류 17㎞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를 남쪽 경계, 아무르강을 북쪽 경계, 우수리강을 서쪽 경계, 바다를 동쪽 경계로 한 땅을 일컫는다. 바다를 따라 펼쳐진 지역이라고 해서 연해주라고 불리며 한반도 면적의 4분의 3 정도다.

당초 고려인은 1863년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했다. 64년 러시아당국의 이주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거주하게 됐는데 이주 원년 차이로 ‘고려인 연해주 이주 150주년 기념행사’를 한국은 2013년에, 고려인 사회는 2014년에 각각 갖게 됐다.

이주민의 지속적인 증가로 1882년 연해주에는 러시아인(8,385명)보다 고려인(1만137명)이 훨씬 많았다. 그러다 1937년 9월9일 고려인 18만명이 수송열차 편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다. 스탈린이 자행한 강제이주 정책으로 70여년 가꾼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고려인들은 조국과 천리 만리 떨어진 이국땅을 떠도는 낭인이 됐다.

현재 연해주에 살고 있는 4만의 고려인 중에는 소련 해체 전부터 터전을 잡고 살고 있는 토박이, 중앙아시아서 재이주한 큰땅치, 2차대전 후 사할린에서 이주해온 화태치가 섞여 있다. 여기에 북한에서 건너온 ‘북선치’, 한국에서 넘어간 ‘남선치’가 섞여있고 중국에서 넘어온 ‘조선족’까지 포함해 한인사회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곳은 다양한 한인들이 모여 사는 한민족공동체의 실험무대가 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때 독일 함정 10척을 침몰시킨 C-56 잠수함이 블라디보스토크 상선부두 인근에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상선부두 앞에는 박물관으로 변신한 C-56 잠수함이 있었다. 2차세계대전 때 독일 함정 10대를 침몰시킨 전설의 잠수함에는 참전 군인들의 사진과 동상, 당시 사용한 어뢰 등이 전시돼있었다.

이 잠수함 옆에는 2차대전 참전용사를 기리는 ‘영원의 불꽃’이 24시간 꺼지지 않은 채로 타오르고 있었고, 바로 뒤편에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방문 기념 개선문이 우뚝 서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인 혁명광장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은 혁명광장이었다. 깃발과 나팔을 든 거대한 병사의 거대한 동상 앞에서 시민들이 롤러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광장 길 건너에는 1906년 문을 연 ‘굼백화점’이 있었지만 명성과는 달리 살 만한 물건은 없었다. 5층 레스토랑에 올라가 아이스 커피를 주문했는데, 냉커피 문화가 없는지 기다리다 숨 넘어갈 뻔했다.

120m 높이에 있는 독수리전망대는 시내와 내해 깊숙이 들어온 만과 다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천혜의 관광명소였다. 만의 이름은 ‘골든혼’, 바로 이스탄불 구도심과 신도심 사이의 만과 같은 이름이다. 사장교인 금각교의 철선은 절반 이상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는 러시아와 일부 슬라브 국가의 키릴문자를 만든 키릴형제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동상 앞뒤 난간과 십자가 기둥을 지탱하는 철선에는 온갖 종류의 자물통들이 채워져 있다. 열쇠는 아마 골든혼에 수장돼 있을 것이다.

러시아 소녀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 거리의 벤치에 앉아있는 인형 캐릭터를 쳐다보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 극장의 로비에서 일가족이 러시아 민속공연을 하고 있다.

러시아 글자를 보고 있노라면 영어도 아닌 것이, 상형문자도 아닌 것이 요상하기 그지없다. 발음으로 보면 영어의 P자 알파벳이 R(ㄹ)처럼, H자는 N(ㄴ)으로 읽히고 있어 영어권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럽다. 러시아에서는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다. 키릴형제가 문자를 만들기 위해 외국에서 영어를 들여오다 실수로 알파벳 판을 길바닥에 쏟아버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러시아 글자가 영어와 닮은 듯하면서도 뒤죽박죽이 됐다는 말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기 전 현지 마트를 한번 들렀다. 현대식으로 깨끗하게 단장된 마트 한켠에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한 눈에도 고려인임을 알 수 있는 할머니가 김치와 젓갈 등 반찬을 팔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 마트에서 만난 고려인 할머니가 김치와 젓갈류 등을 팔고 있다. 러시아에서도 컵라면과 김치가 인기다.

“안녕하세요” “네, 어디서 오셨수” “대구요”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핏줄이 당겨서 한 마디라도 더 나눠보고 싶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하바로브스크의 한 전통시장에서는 고려인 할머니가 화장실을 찾는 일행에게 길을 직접 인도하는 것은 물론 화장실 사용료 ‘10루블’도 대납해줬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시장과 러시아 극동지역의 시장에서 만난 고려인 2세는 다르지 않았다. 모두 조국서 홀대받고 잊혀진 우리 동포였다. 꿋꿋하게 한민족으로 살고 있는 고려인에게 대한민국은 언제쯤 손을 내밀려나.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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