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은 단편 애니메이션 '사랑은 단백질'로 이질적인 재능을 영화계에 알린다.

100원짜리 동전 한 닢이 아쉬운 청춘 셋이 한 방에서 함께 지낸다. 무더위에 지쳐 몸보신 좀 하자는 생각에 치킨을 배달시키기로 ‘용단’을 내린다. 도망치는 돼지저금통의 배를 째면서까지 돈을 어렵게 마련해 치킨을 주문한다. 오랜만의 단백질 섭취를 애타게 기다릴 즈음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여니 닭인 사장이 직접 배달에 나섰다. 주문은 밀렸고, 닭이 없어 늦었다며 변명을 늘어놓던 사장은 눈물을 쏟으며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자기 아들을 희생해 치킨을 만들었으니 맛있게 먹어달라고. 세 남자는 갈등한다. 누군가는 처연한 사연을 듣고도 치킨을 먹고 싶냐고 힐난하고, 또 누군가는 돈을 내고 어렵게 주문한 치킨을 왜 못 먹냐고 맞선다. 도발적인 설정으로 차가운 웃음과 섬뜩한 슬픔을 전하는 이 단편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사랑은 단백질’(2008). 약육강식 사회를 풍자한 24분짜리 짧은 이 영화로 연상호 감독은 영화계에 이름을 알렸다.

남의 길을 가지 않는다
연상호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잔혹스릴러를 표방했다.

도발은 단편으로 그치지 않았다. 연 감독은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으로 국내 애니메이션계에 새 이정표를 세운다. 애니메이션은 어린이용이거나 가족이 함께 즐기는 영상물이라는 편견을 깨뜨린다. ‘돼지의 왕’은 성인이 봐도 소름이 끼칠 스릴러물이다. 아내를 죽인 한 남자가 과거 중학교 동창을 오랜 만에 만나 학창시절의 비밀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았다. 목에서 피를 흘리며 식탁에 엎드린 여인의 모습으로 영화는 열리고 샤워하며 괴로워하는 남자의 모습이 이어진다. 남자는 중학교 시절의 아픈 기억을 지우기 위해 15년만에 동창을 찾아 나서고 학교에서 벌어진 자살 사건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돼지의 왕’은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를 배경으로 한국사회의 고질을 세묘한다. 왕따 문제를 학생들 사이의 문제로만 국한하지 않고 빈부격차와 계층간 갈등으로 연결시킨다. 부모의 재력과 직업에 의해 자식들의 삶이 어떻게 결정되는 지, 학창시절 느낀 소외감이 성년이 돼서 폭력으로 어떻게 발현되는 지도 두루 살핀다. 여느 실사영화도 쉬 담지 못하는, 우울하고도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돼지의 왕’은 품는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서구적 판타지를 자극해야 한다는 선입견과도 거리를 멀리 둔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살짝 째진 눈을 지닌 등장인물들의 면면은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이 영화의 정체성과 맞닿아있다.

‘돼지의 왕’은 사회비판적이라는 수식이 붙으면 종종 상업성과 거리가 멀 것이라고 편견과도 맞선다. 자살사건이 타살사건일 수도 있다는 정보를 조금씩 흘리고, 살인자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라는 결말로 향하는 과정에서 스릴과 서스펜스를 안긴다. ‘돼지의 왕’이 저예산 사회파 독립 애니메이션이라는 상업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봉 당시 독립영화계를 놀라게 한 흥행 성적(1만9,798명)을 거둔 이유다(“200만명은 족히 볼 것”이라는 연 감독의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돼지의 왕’은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과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NETPAC) 등 3개 상을 수상했고, 다음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개성 넘치는 데뷔작으로 눈에 띄는 성과를 얻었다.

금기는 없다
연상호 감독은 장편 애니메이션 '사이비'로 사이비종교의 문제점을 과감히 비판한다.

전형성을 거부하는 연 감독의 성향은 다음 작품 ‘사이비’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수몰지구로 지정된 어느 시골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으로 영화 소재로 터부시되는 종교 비판을 담고 있다.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종교를 악용하는 사기집단의 행각을 통해 한국사회 사이비 종교집단을 비판한다.

‘사이비’는 ‘돼지의 왕’처럼 신랄하다. 수몰지구 지정이라는 수난을 기도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주민들, 이를 이용하려는 사기집단, 사기집단에 고용된 목사 등을 내세우며 한국사회의 종교가 개개인의 사사로운 잇속을 변질됐다고 일갈한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이 다 야비하고 무자비한데 종교인도 예외는 아니라는, 비관적인 세계관이 내재돼 있다.

‘사이비’는 ‘돼지의 왕’처럼 성인물을 표방한다. 폭력성도 만만치 않고, 사회비판의 수위도 꽤 높다. 특정 종교를 비판한 시사프로그램이 수난을 당하는 장면에 익숙한 한국사회에서 아슬아슬하다 싶은 장면들이 바통을 이어 받는다. ‘돼지의 왕’에 이어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겠다는 연 감독의 의지가 돋보인다.

세상에 영웅 따위는 없다
연상호 감독의 중편애니메이션 '창'은 군대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속 연 감독의 세계관은 냉소적이다.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 속에는 영웅으로 추앙 받을 만한 행위를 하는 인물은 있으나 실제 영웅 따위는 없다. ‘돼지의 왕’ 속 인물들도 지리멸렬하다. 중학교 시절 또래 집단에서 우상 취급을 받던 인물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행동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훔친다. 다른 인물들은 소설가가 꿈이나 현실은 대필 작가이거나 부도난 회사의 대표이다.

‘사이비’도 마찬가지다. 마을사람들 돈을 노리는 교회의 음모를 알고 있는 인물은 동네의 술주정뱅이 망나니다. 사람들이 혐오감을 지닌 인물만이 사이비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범죄를 앞서서 막으려 한다. 사람들은 선한 웃음을 띤 사기꾼 말만 믿을 수 밖에 없다. 선하고 정의감으로 뭉친 영웅이 없는 상황에서 영화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빚는다.

‘부산행’도 영웅다운 영웅이 없다. 부산행 KTX에 올라탄 좀비들에 맞선 석우(공유)와 상화(마동석)가 영웅적인 인물이랄 수 있다. 하지만 펀드매니저 석우는 도입부에서 이기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좀비의 위협에 놓인 사람들을 구하기는커녕 자신과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열차 객실 문을 무정하게 닫는다. 상화가 ‘개미핣기’라 부르며 이죽거릴 때 제대로 반박도 못 하는 입장이다. 후반부에 이르면 재난의 원인이 석우로부터 비롯됐을 지 모른다고 영화는 암시한다. 상화는 석우보다는 떳떳한 인물이나 그의 옷차림과 말투를 감안했을 때 영웅적인 직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뼛속까지 이기주의로 가득 찬 용석(김의석)보다 나은 인물들이라 할 수 있으나 연 감독은 끝내 영웅이란 칭호를 붙여주지 않으려 한다.

상업적인, 그러나 여전히 전복적인
'부산행'은 상업적인 요소가 많으면서도 전복적이다. NEW 제공

‘부산행’은 연 감독의 이전 작품에 비하면 상업적이다. 대중의 눈높이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좀비가 등장하는 재난영화이기에 표현 수위가 높을 수 있는데, 시각적 잔혹성은 전작 애니메이션보다 덜하다. 신파라는 말을 듣는 결말은 연 감독의 작가적 야심이 상업성과 타협하며 나온 산물이다.

하지만 연 감독의 사회비판과 전복성은 ‘부산행’에서도 여전하다. 용석을 내세워 권위적이고 이기적이며 지도력 없는 사회 지도층을 조롱한다. 용석이 “좀비에 감염됐다”고 딱지를 붙이며 무고한 사람들을 위기에 몰아넣는 장면은 이념적 색깔론을 쉬 떠올리게 한다. 닫힌 문과 열린 문으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폐쇄적 구조도 영화는 비판한다. 노숙인(최귀화)을 등장시켜 경제적으로 최하층에 놓인 시민을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는 한국사회의 차별적 시선과 편견도 꼬집는다. 인간 대우를 못 받던 노숙인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극적 반전을 이루는 행동을 한다. 염치 없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잇속을 쏙쏙 챙기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인물이 보다 나은 세상에 힘을 더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가부장적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용석이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뒤 전동차를 모는 장면도 전복적이고도 상징적이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주체성도 없이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좀비 같은 존재가 한국사회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통렬한 비판으로 읽힌다.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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