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도 될 범죄는 없다]<9>제주 보육교사 피살사건

남자친구와 다툼 후 귀갓길
콜택시도 잡기 어려운 새벽 3시
차에 탄 후 배수로서 사체로 발견
성폭행 저항하다 목 졸려 숨진 듯
용의자 좁혀졌지만…
논밭에 버려진 가방ㆍ휴대폰
그리고 시신의 어디에서도
범인 DNA나 지문 검출 안돼
알리바이 의심가는 택시기사
진술 오락가락하던 40대 남성
거짓말탐지기 분석 결과 ‘거짓’
직접증거 없어 범행 입증 못해

7년 전 겨울이었다. 제주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얼굴이 베이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던 2월 초순이었다. 경찰에 들어와 겪은 최초의 살인 사건. 피해자는 아이를 유독 좋아해 어린이 집 보육교사가 됐다는 여성 이모(당시 27세)씨였다. 뭍으로 나가라는 주변 권유에도 아랑곳 않고 고향을 지킨 그는 목이 졸린 채 자신이 나고 자란 동네에서 멀지 않은 논밭과 도로 사이 배수로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녀의 죽음에 연민을 표할 새도 없이 언제 끝날지도 모를 수사에 들어갔다. 혹시 범인 검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제주의 폐쇄회로(CC)TV도 샅샅이 뒤졌다. 올해 1월 제주경찰청 미제전담팀장으로 부임해 왔을 때 ‘제주 어린이집 보육교사 피살사건’에는 여전히 ‘미해결’ 딱지가 붙어 있었다. 24일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사건 기록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던 팀장 김승환 경사는 유독 한 용의자를 언급한 부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목격자도 CCTV도 DNA도 없었다

2009년 2월1일 오전 3시쯤이었다. 전날 저녁 제주시청 부근에서 4차에 걸친 고교 동창 모임을 끝낸 이씨는 택시를 타고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남자친구 A씨 집으로 향했다. 모임이 늦게 끝나 미안한 마음에 도착한 A씨의 집. 하지만 평소 담배 연기를 싫어했던 이씨는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A씨 모습에 화가 나 심하게 다툰 뒤 곧바로 집에서 뛰쳐나왔다. 콜택시를 불렀지만 늦은 새벽 시간 탓인지 좀처럼 배차가 되지 않았다. 오전 3시3분 단단히 화가 난 이씨는 A씨에게 ‘실망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이번엔 114에 전화를 걸어 콜택시를 요청하려 했다. 그 순간 도로 끝에서 자동차 한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정황상 이씨가 남자친구 집에서 나와 누군가의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납치ㆍ피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택시 등 차량에 탑승한 이씨는 자택인 애월읍 구엄리 방향으로 가달라고 요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전날 과음한 이씨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고 범인은 차량 내에서 이씨를 성폭행하려다 저항하자 목을 졸라 살해했을 것이다. 김 팀장은 범인이 이씨 집을 지나쳐 애월읍 고내리 고내오름으로 가는 도중 이씨를 죽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씨를 이곳에 유기한 범인은 오전 4시4분 애월읍 광령초등학교 부근을 지나며 이씨 가방 속에 있던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고, 제주시 아라동 인근 논밭을 지나가며 휴대폰을 비롯한 이씨 소지품도 죄다 버렸다. 이씨 가방은 숨진 날로부터 닷새 후인 2월6일, 주검은 8일에 각각 발견됐다.

하지만 사체와 소지품 어디에서도 범인 것으로 보이는 지문이나 유전자정보(DNA)는 검출되지 않았다. 하의가 벗겨진 채로 발견된 이씨 몸에서도 특별한 외상이나 타박상, 성폭행 등 정황은 나오지 않았다. 사인은 경부압박 질식사, 이씨는 말 그대로 호흡이 끊겨 죽음을 맞이했다.

거짓말탐지기가 가리킨 범인… 증거로는 부족

남자친구 A씨가 범인이 아니라면 차량 통행이 드문 제주에서 사건 현장을 지나간 택시기사들이 대거 용의선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A씨 통신기록과 차량에선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도내 택시운전기사 5,000여명을 전수 조사했고, 통신수사와 택시 내 부착돼 있는 타코미터 기록 등을 토대로 택시기사 10여명을 추려냈다.

딱 한 사람, 조사 기간 동안 행적에 대한 진술을 자주 번복했던 40대 택시기사 B씨가 의심스러웠다. B씨는 경찰 조사에서 “용담동에서 애월읍으로 가려다가 중간에 차를 돌렸다”고 진술했다가 “다시 기억해보니 애월로 향하는 일주도로를 이용해 손님을 태우고 지나갔다”고 말을 바꾸는 등 오락가락했다. “손님을 태운 적이 없다”는 말도 “남자 손님을 태웠던 거 같다”는 진술로 바뀌는 등 알리바이의 일관성을 찾을 수 없다.

그를 범인으로 볼 만한 정황증거는 또 있었다. 경찰은 B씨를 설득해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실시했다. “사건 당일 이씨를 태운 적이 있느냐” “이씨를 직접 살해했느냐”는 경찰 검사관의 질문에 그는 모두 ‘아니요’라고 부인했고, 탐지기 분석 결과는 B씨 대답을 ‘거짓’으로 결론 내렸다. 그러나 현행법상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 만으로 범행을 입증할 수는 없다. B씨 택시 안에선 직접 증거가 될 수 있는 이씨 흔적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한 프로파일러는 “거짓말탐지에서 나온 반응은 범행 증거가 있고 피의자가 끝까지 부인할 때 보강 자료 정도로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제주경찰청 미제팀 형사들은 B씨를 포함한 용의자들 소재를 파악하는 한편, 주변인 조사를 다시 시작해 새로운 정보를 모으고 있다. 김 팀장은 “사체 유기 장소나 소지품이 발견된 곳은 제주도 지리에 밝지 않으면 쉽게 알 수 없다”며 “피해자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7년 간 행적을 역추적해 반드시 범인을 붙잡겠다”고 말했다.

제주=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이 기사는 과거 수사기록, 수사관, 유가족 등 설명 등을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관련 제보는 제주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 (064)798-3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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